[비평] 모두가 템즈강에 불을 처지를 수는 없다 - 서정인 ‘강’
입력 2022.02.13 (21:35)
수정 2022.02.13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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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발표된 시기는 1968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도 더 전이지요.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시기는 한국 사회가 전쟁의 상흔을 딛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기하던 때입니다. 농경사회의 잔재를 일소하고 도시, 특히 서울 중심으로 삶이 재편되던 시기이기도 하지요. 이촌향도의 움직임 속에서 농촌 마을은 이전의 활기를 잃고 공동체의 전통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해요. 이 소설의 밑바탕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늙은 대학생 김 씨, 세무서 주사 이 씨, 초등학교 선생 박 씨 등 같은 하숙집에 기거하는 세 사내가 결혼식 참석차 내려간 시골 마을 ‘군하리’는 군색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요. 면사무소와 경찰관 파출소는 나란히 붙어있고 농협 지소는 창고 같은 형색이고요. 거기엔 ‘농협이 잘되어야 농민이 잘살 수 있다’라는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어요. 막 발돋움하고 있는 국가 중심의 농촌진흥책이 이 마을에도 예외 없이 대세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 구호가 무색하게 마을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초라하고 옹색하기만 하지요. 작가 서정인 선생은 그 정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납작한 이발소 안에서 틀림없이 한 달 전에 제대를 했을 촌스럽게 생긴 젊은이가 고개를 쑥 뽑고 내다본다. 약포도 있고 미장원도 있다. 신부화장도 하는 모양이다.”
이 장면의 대미는 아무래도 늙은 대학생 김 씨가 옥호도 없는 여인숙의 소년을 만나는 장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군하리’에서 삼십 리나 더 들어간 마을 출신으로 이모부 댁에 기거하며 ‘국민학교’를 다니는 소년은 좀 전까지 숙제하던 자신의 방을 비워주며 손님인 김 씨의 잠자리를 마련해주죠. 그의 가슴에는 훈장처럼 ‘반장’이라는 명패가 달려 있어요, 공부를 잘하느냐는 김 씨의 질문에 소년은 “예, 접때두 일등했어요.”라고 답하죠. 서정인 선생은 이 답변 다음에 바로 이제까지의 전지적 시점을 버리고 느닷없이 김 씨의 시점으로 “아, 이건 뻔뻔스럽구나, 못 생기고 남루한 옷을 입은 주제에.”라는 내적 독백을 덧붙이죠. 선생의 스타일로 자주 거론되는 그 유명한 자유간접화법이 발휘되는 순간인데, 이 갑작스러운 시점 이동을 통해 독자들은 잡다한 설명 없이도 늙은 대학생인 김 씨의 삶의 내력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리게 되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이 소설의 한 대목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였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된다”로 시작하는 이 자조적 탄식은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처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로 마무리됩니다.
「강」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수 있을 테지만 이 소설에 ‘강’은 나오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처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에 나오는 ‘템즈강’을 표제에 가장 근사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지요. 그렇다면 서정인 선생은 왜 이 소설의 제목으로 ‘강’을 선택한 걸까요? 왜 이 소설은 ‘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템즈강에 불을 지르다’의 원어 ‘burn the Themes’는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을 하다’라는 의미의 영어식 표현이랍니다. 서정인 선생은 영문학을 전공하시고 전북대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치신 경험이 있으시지요. 말하자면 작가의 지성과 개성이 발휘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지점은 이 소설의 출발점이자 주제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도도한 강물의 흐름으로 대변되는 시대적 굴레를 뛰어넘는 어떤 행위는 때로 미친 짓으로 손가락질받기도 하지만 대개 위대한 행위로 찬양되어왔지요. 우리는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을 ‘천재’ 혹은 ‘영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 시대의 분위기, 그것이 요구하는 역사적 명령을 거부하기 힘듭니다. 선생의 용법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모두가 역사의 강물 바깥으로 헤엄쳐 나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강」에 등장하는 세 사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적 행위를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그들은 시대의 물살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는 인물들일 뿐입니다. 세무서 주사 이 씨는 자신의 잇속을 차리기 바쁘고, 선생 박 씨는 그런 이 씨의 잔꾀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를 부러워하기만 하지요. 일견 지식인의 면모를 지니는 듯 보이는 늙은 대학생 김 씨마저 일찍이 모든 것을 체념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요. 그는 “출세할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어떠한 것도 주임교수의 인정을 받는 일보다 더 중요하지 않”으며 “외국에 가는 기회는 단 하나도 그의 시도를 받지 않고 지나치는 법이 없”는 사람입니다. ‘군하리’ 주민들은 어떨까요? 그들에게는 세 사내가 누리고 있는 도시적 삶의 애환이나 절망마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 일 장날이 되어서야 약간의 활기를 되찾는 ‘서울집’은 말할 것도 없고, 처조카를 데려다 잔심부름을 시키며 영업을 이어가는 여인숙 주인마저 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아요. 국가는 ‘농협’이 잘 되면 ‘농민’이 잘살게 된다며 장밋빛 희망을 주입하고 있지만, 정작 그 구호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간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이러한 사태는, 서정인 선생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처음 출발할 때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곳으로부터 사뭇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와 있”는 일이 아닐까요?
놀라운 것은 「강」이 이 시대적 불협화음의 현장을 재현하는 방식입니다. 서정인 선생은 당대 작가들에게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엄중한 선지자의 목소리나 비판적 지식인의 어투를 빌리지 않습니다. 선생은 이 초라하고 남루한 삶에 깃들어 있는 삶의 기미,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가슴 아픈 실존의 현장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포착해내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이 소설의 제목이 ‘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연유가 여기에 있는 듯해요. ‘강’은 세상사와 무관하게 유유하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자연의 표상, 즉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국가의 정책이나 구호와 무관하게 삶은 지속될 수밖에 없지요. 우리 모두는 ‘천재’나 ‘영웅’이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우리의 삶이 의미가 없지는 않을 거예요. 어떤 삶이든 그것 하나하나는 소중하고 남다른 것이 아닐 수 없어요. 「강」은 시대적 흐름 속에 소외된 채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반 소시민들의 옹색하고 초라한 삶을 어떠한 비판적 훈계도 없이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보듬으며 그러한 삶을 긍정하고 실존적 비애로 감쌉니다. 1960년대의 소설 가운데 ‘삶은 지속된다’라는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무엇이냐 물을 때 주저 없이 「강」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논점이 될 만한 요소에 대한 짧은 소견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해요. 소설의 결말 부분, ‘서울집’에서 나온 여자는 늙은 대학생이 잠든 방으로 들어가요. 고향도 처소도 명확하지 않은 떠돌이 술집 작부가 시골 마을에서 혼사를 치른 ‘신부’를 동경하고 ‘대학생’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는 이 장면은 당대 여성이 처한 현실을 아프게 보여주고 있지만, 요즘 독자들의 성정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그녀는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라는 대목에서 보이듯 여성성을 볼모로 시대의 환부를 가로지르려는 남성적 판타지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모두가 강물의 흐름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와중에 그녀 혼자만 잇속이나 계산과는 무관한 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어쩌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녀야말로 진정 ‘템즈강에 불을 지르는 행위’를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후 ‘이인실’이라는 여성의 한평생을 판소리의 리듬에 기대 되살려낸 실험적인 장편소설 『달궁』으로 이어지는 서정인 선생의 행보에 비추어보면,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가장 연약하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여성의 삶에 내재한 ‘은총’의 힘, 그 강력한 생명력의 근원을 애초부터 이 여성을 통해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요. 「강」과 선생의 후속작들을 변화의 요소를 통해서만 바라보지 않고 연속 선상에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얘깁니다. 「강」에 대한 새로운 독해가 필요하다는 말이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소설에 대한 기대를 배가시켜주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신수정/문학평론가·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늙은 대학생 김 씨, 세무서 주사 이 씨, 초등학교 선생 박 씨 등 같은 하숙집에 기거하는 세 사내가 결혼식 참석차 내려간 시골 마을 ‘군하리’는 군색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요. 면사무소와 경찰관 파출소는 나란히 붙어있고 농협 지소는 창고 같은 형색이고요. 거기엔 ‘농협이 잘되어야 농민이 잘살 수 있다’라는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어요. 막 발돋움하고 있는 국가 중심의 농촌진흥책이 이 마을에도 예외 없이 대세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 구호가 무색하게 마을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초라하고 옹색하기만 하지요. 작가 서정인 선생은 그 정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납작한 이발소 안에서 틀림없이 한 달 전에 제대를 했을 촌스럽게 생긴 젊은이가 고개를 쑥 뽑고 내다본다. 약포도 있고 미장원도 있다. 신부화장도 하는 모양이다.”
이 장면의 대미는 아무래도 늙은 대학생 김 씨가 옥호도 없는 여인숙의 소년을 만나는 장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군하리’에서 삼십 리나 더 들어간 마을 출신으로 이모부 댁에 기거하며 ‘국민학교’를 다니는 소년은 좀 전까지 숙제하던 자신의 방을 비워주며 손님인 김 씨의 잠자리를 마련해주죠. 그의 가슴에는 훈장처럼 ‘반장’이라는 명패가 달려 있어요, 공부를 잘하느냐는 김 씨의 질문에 소년은 “예, 접때두 일등했어요.”라고 답하죠. 서정인 선생은 이 답변 다음에 바로 이제까지의 전지적 시점을 버리고 느닷없이 김 씨의 시점으로 “아, 이건 뻔뻔스럽구나, 못 생기고 남루한 옷을 입은 주제에.”라는 내적 독백을 덧붙이죠. 선생의 스타일로 자주 거론되는 그 유명한 자유간접화법이 발휘되는 순간인데, 이 갑작스러운 시점 이동을 통해 독자들은 잡다한 설명 없이도 늙은 대학생인 김 씨의 삶의 내력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리게 되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이 소설의 한 대목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였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된다”로 시작하는 이 자조적 탄식은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처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로 마무리됩니다.
「강」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수 있을 테지만 이 소설에 ‘강’은 나오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처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에 나오는 ‘템즈강’을 표제에 가장 근사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지요. 그렇다면 서정인 선생은 왜 이 소설의 제목으로 ‘강’을 선택한 걸까요? 왜 이 소설은 ‘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템즈강에 불을 지르다’의 원어 ‘burn the Themes’는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을 하다’라는 의미의 영어식 표현이랍니다. 서정인 선생은 영문학을 전공하시고 전북대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치신 경험이 있으시지요. 말하자면 작가의 지성과 개성이 발휘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지점은 이 소설의 출발점이자 주제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도도한 강물의 흐름으로 대변되는 시대적 굴레를 뛰어넘는 어떤 행위는 때로 미친 짓으로 손가락질받기도 하지만 대개 위대한 행위로 찬양되어왔지요. 우리는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을 ‘천재’ 혹은 ‘영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 시대의 분위기, 그것이 요구하는 역사적 명령을 거부하기 힘듭니다. 선생의 용법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모두가 역사의 강물 바깥으로 헤엄쳐 나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강」에 등장하는 세 사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적 행위를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그들은 시대의 물살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는 인물들일 뿐입니다. 세무서 주사 이 씨는 자신의 잇속을 차리기 바쁘고, 선생 박 씨는 그런 이 씨의 잔꾀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를 부러워하기만 하지요. 일견 지식인의 면모를 지니는 듯 보이는 늙은 대학생 김 씨마저 일찍이 모든 것을 체념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요. 그는 “출세할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어떠한 것도 주임교수의 인정을 받는 일보다 더 중요하지 않”으며 “외국에 가는 기회는 단 하나도 그의 시도를 받지 않고 지나치는 법이 없”는 사람입니다. ‘군하리’ 주민들은 어떨까요? 그들에게는 세 사내가 누리고 있는 도시적 삶의 애환이나 절망마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 일 장날이 되어서야 약간의 활기를 되찾는 ‘서울집’은 말할 것도 없고, 처조카를 데려다 잔심부름을 시키며 영업을 이어가는 여인숙 주인마저 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아요. 국가는 ‘농협’이 잘 되면 ‘농민’이 잘살게 된다며 장밋빛 희망을 주입하고 있지만, 정작 그 구호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간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이러한 사태는, 서정인 선생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처음 출발할 때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곳으로부터 사뭇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와 있”는 일이 아닐까요?
놀라운 것은 「강」이 이 시대적 불협화음의 현장을 재현하는 방식입니다. 서정인 선생은 당대 작가들에게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엄중한 선지자의 목소리나 비판적 지식인의 어투를 빌리지 않습니다. 선생은 이 초라하고 남루한 삶에 깃들어 있는 삶의 기미,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가슴 아픈 실존의 현장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포착해내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이 소설의 제목이 ‘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연유가 여기에 있는 듯해요. ‘강’은 세상사와 무관하게 유유하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자연의 표상, 즉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국가의 정책이나 구호와 무관하게 삶은 지속될 수밖에 없지요. 우리 모두는 ‘천재’나 ‘영웅’이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우리의 삶이 의미가 없지는 않을 거예요. 어떤 삶이든 그것 하나하나는 소중하고 남다른 것이 아닐 수 없어요. 「강」은 시대적 흐름 속에 소외된 채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반 소시민들의 옹색하고 초라한 삶을 어떠한 비판적 훈계도 없이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보듬으며 그러한 삶을 긍정하고 실존적 비애로 감쌉니다. 1960년대의 소설 가운데 ‘삶은 지속된다’라는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무엇이냐 물을 때 주저 없이 「강」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논점이 될 만한 요소에 대한 짧은 소견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해요. 소설의 결말 부분, ‘서울집’에서 나온 여자는 늙은 대학생이 잠든 방으로 들어가요. 고향도 처소도 명확하지 않은 떠돌이 술집 작부가 시골 마을에서 혼사를 치른 ‘신부’를 동경하고 ‘대학생’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는 이 장면은 당대 여성이 처한 현실을 아프게 보여주고 있지만, 요즘 독자들의 성정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그녀는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라는 대목에서 보이듯 여성성을 볼모로 시대의 환부를 가로지르려는 남성적 판타지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모두가 강물의 흐름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와중에 그녀 혼자만 잇속이나 계산과는 무관한 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어쩌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녀야말로 진정 ‘템즈강에 불을 지르는 행위’를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후 ‘이인실’이라는 여성의 한평생을 판소리의 리듬에 기대 되살려낸 실험적인 장편소설 『달궁』으로 이어지는 서정인 선생의 행보에 비추어보면,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가장 연약하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여성의 삶에 내재한 ‘은총’의 힘, 그 강력한 생명력의 근원을 애초부터 이 여성을 통해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요. 「강」과 선생의 후속작들을 변화의 요소를 통해서만 바라보지 않고 연속 선상에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얘깁니다. 「강」에 대한 새로운 독해가 필요하다는 말이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소설에 대한 기대를 배가시켜주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신수정/문학평론가·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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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 모두가 템즈강에 불을 처지를 수는 없다 - 서정인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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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2-02-13 21:35:22
- 수정2022-02-13 21:35:36
「강」이 발표된 시기는 1968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도 더 전이지요.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시기는 한국 사회가 전쟁의 상흔을 딛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기하던 때입니다. 농경사회의 잔재를 일소하고 도시, 특히 서울 중심으로 삶이 재편되던 시기이기도 하지요. 이촌향도의 움직임 속에서 농촌 마을은 이전의 활기를 잃고 공동체의 전통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해요. 이 소설의 밑바탕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늙은 대학생 김 씨, 세무서 주사 이 씨, 초등학교 선생 박 씨 등 같은 하숙집에 기거하는 세 사내가 결혼식 참석차 내려간 시골 마을 ‘군하리’는 군색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요. 면사무소와 경찰관 파출소는 나란히 붙어있고 농협 지소는 창고 같은 형색이고요. 거기엔 ‘농협이 잘되어야 농민이 잘살 수 있다’라는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어요. 막 발돋움하고 있는 국가 중심의 농촌진흥책이 이 마을에도 예외 없이 대세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 구호가 무색하게 마을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초라하고 옹색하기만 하지요. 작가 서정인 선생은 그 정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납작한 이발소 안에서 틀림없이 한 달 전에 제대를 했을 촌스럽게 생긴 젊은이가 고개를 쑥 뽑고 내다본다. 약포도 있고 미장원도 있다. 신부화장도 하는 모양이다.”
이 장면의 대미는 아무래도 늙은 대학생 김 씨가 옥호도 없는 여인숙의 소년을 만나는 장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군하리’에서 삼십 리나 더 들어간 마을 출신으로 이모부 댁에 기거하며 ‘국민학교’를 다니는 소년은 좀 전까지 숙제하던 자신의 방을 비워주며 손님인 김 씨의 잠자리를 마련해주죠. 그의 가슴에는 훈장처럼 ‘반장’이라는 명패가 달려 있어요, 공부를 잘하느냐는 김 씨의 질문에 소년은 “예, 접때두 일등했어요.”라고 답하죠. 서정인 선생은 이 답변 다음에 바로 이제까지의 전지적 시점을 버리고 느닷없이 김 씨의 시점으로 “아, 이건 뻔뻔스럽구나, 못 생기고 남루한 옷을 입은 주제에.”라는 내적 독백을 덧붙이죠. 선생의 스타일로 자주 거론되는 그 유명한 자유간접화법이 발휘되는 순간인데, 이 갑작스러운 시점 이동을 통해 독자들은 잡다한 설명 없이도 늙은 대학생인 김 씨의 삶의 내력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리게 되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이 소설의 한 대목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였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된다”로 시작하는 이 자조적 탄식은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처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로 마무리됩니다.
「강」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수 있을 테지만 이 소설에 ‘강’은 나오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처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에 나오는 ‘템즈강’을 표제에 가장 근사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지요. 그렇다면 서정인 선생은 왜 이 소설의 제목으로 ‘강’을 선택한 걸까요? 왜 이 소설은 ‘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템즈강에 불을 지르다’의 원어 ‘burn the Themes’는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을 하다’라는 의미의 영어식 표현이랍니다. 서정인 선생은 영문학을 전공하시고 전북대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치신 경험이 있으시지요. 말하자면 작가의 지성과 개성이 발휘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지점은 이 소설의 출발점이자 주제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도도한 강물의 흐름으로 대변되는 시대적 굴레를 뛰어넘는 어떤 행위는 때로 미친 짓으로 손가락질받기도 하지만 대개 위대한 행위로 찬양되어왔지요. 우리는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을 ‘천재’ 혹은 ‘영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 시대의 분위기, 그것이 요구하는 역사적 명령을 거부하기 힘듭니다. 선생의 용법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모두가 역사의 강물 바깥으로 헤엄쳐 나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강」에 등장하는 세 사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적 행위를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그들은 시대의 물살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는 인물들일 뿐입니다. 세무서 주사 이 씨는 자신의 잇속을 차리기 바쁘고, 선생 박 씨는 그런 이 씨의 잔꾀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를 부러워하기만 하지요. 일견 지식인의 면모를 지니는 듯 보이는 늙은 대학생 김 씨마저 일찍이 모든 것을 체념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요. 그는 “출세할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어떠한 것도 주임교수의 인정을 받는 일보다 더 중요하지 않”으며 “외국에 가는 기회는 단 하나도 그의 시도를 받지 않고 지나치는 법이 없”는 사람입니다. ‘군하리’ 주민들은 어떨까요? 그들에게는 세 사내가 누리고 있는 도시적 삶의 애환이나 절망마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 일 장날이 되어서야 약간의 활기를 되찾는 ‘서울집’은 말할 것도 없고, 처조카를 데려다 잔심부름을 시키며 영업을 이어가는 여인숙 주인마저 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아요. 국가는 ‘농협’이 잘 되면 ‘농민’이 잘살게 된다며 장밋빛 희망을 주입하고 있지만, 정작 그 구호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간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이러한 사태는, 서정인 선생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처음 출발할 때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곳으로부터 사뭇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와 있”는 일이 아닐까요?
놀라운 것은 「강」이 이 시대적 불협화음의 현장을 재현하는 방식입니다. 서정인 선생은 당대 작가들에게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엄중한 선지자의 목소리나 비판적 지식인의 어투를 빌리지 않습니다. 선생은 이 초라하고 남루한 삶에 깃들어 있는 삶의 기미,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가슴 아픈 실존의 현장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포착해내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이 소설의 제목이 ‘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연유가 여기에 있는 듯해요. ‘강’은 세상사와 무관하게 유유하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자연의 표상, 즉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국가의 정책이나 구호와 무관하게 삶은 지속될 수밖에 없지요. 우리 모두는 ‘천재’나 ‘영웅’이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우리의 삶이 의미가 없지는 않을 거예요. 어떤 삶이든 그것 하나하나는 소중하고 남다른 것이 아닐 수 없어요. 「강」은 시대적 흐름 속에 소외된 채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반 소시민들의 옹색하고 초라한 삶을 어떠한 비판적 훈계도 없이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보듬으며 그러한 삶을 긍정하고 실존적 비애로 감쌉니다. 1960년대의 소설 가운데 ‘삶은 지속된다’라는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무엇이냐 물을 때 주저 없이 「강」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논점이 될 만한 요소에 대한 짧은 소견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해요. 소설의 결말 부분, ‘서울집’에서 나온 여자는 늙은 대학생이 잠든 방으로 들어가요. 고향도 처소도 명확하지 않은 떠돌이 술집 작부가 시골 마을에서 혼사를 치른 ‘신부’를 동경하고 ‘대학생’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는 이 장면은 당대 여성이 처한 현실을 아프게 보여주고 있지만, 요즘 독자들의 성정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그녀는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라는 대목에서 보이듯 여성성을 볼모로 시대의 환부를 가로지르려는 남성적 판타지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모두가 강물의 흐름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와중에 그녀 혼자만 잇속이나 계산과는 무관한 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어쩌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녀야말로 진정 ‘템즈강에 불을 지르는 행위’를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후 ‘이인실’이라는 여성의 한평생을 판소리의 리듬에 기대 되살려낸 실험적인 장편소설 『달궁』으로 이어지는 서정인 선생의 행보에 비추어보면,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가장 연약하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여성의 삶에 내재한 ‘은총’의 힘, 그 강력한 생명력의 근원을 애초부터 이 여성을 통해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요. 「강」과 선생의 후속작들을 변화의 요소를 통해서만 바라보지 않고 연속 선상에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얘깁니다. 「강」에 대한 새로운 독해가 필요하다는 말이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소설에 대한 기대를 배가시켜주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신수정/문학평론가·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늙은 대학생 김 씨, 세무서 주사 이 씨, 초등학교 선생 박 씨 등 같은 하숙집에 기거하는 세 사내가 결혼식 참석차 내려간 시골 마을 ‘군하리’는 군색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요. 면사무소와 경찰관 파출소는 나란히 붙어있고 농협 지소는 창고 같은 형색이고요. 거기엔 ‘농협이 잘되어야 농민이 잘살 수 있다’라는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어요. 막 발돋움하고 있는 국가 중심의 농촌진흥책이 이 마을에도 예외 없이 대세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 구호가 무색하게 마을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초라하고 옹색하기만 하지요. 작가 서정인 선생은 그 정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납작한 이발소 안에서 틀림없이 한 달 전에 제대를 했을 촌스럽게 생긴 젊은이가 고개를 쑥 뽑고 내다본다. 약포도 있고 미장원도 있다. 신부화장도 하는 모양이다.”
이 장면의 대미는 아무래도 늙은 대학생 김 씨가 옥호도 없는 여인숙의 소년을 만나는 장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군하리’에서 삼십 리나 더 들어간 마을 출신으로 이모부 댁에 기거하며 ‘국민학교’를 다니는 소년은 좀 전까지 숙제하던 자신의 방을 비워주며 손님인 김 씨의 잠자리를 마련해주죠. 그의 가슴에는 훈장처럼 ‘반장’이라는 명패가 달려 있어요, 공부를 잘하느냐는 김 씨의 질문에 소년은 “예, 접때두 일등했어요.”라고 답하죠. 서정인 선생은 이 답변 다음에 바로 이제까지의 전지적 시점을 버리고 느닷없이 김 씨의 시점으로 “아, 이건 뻔뻔스럽구나, 못 생기고 남루한 옷을 입은 주제에.”라는 내적 독백을 덧붙이죠. 선생의 스타일로 자주 거론되는 그 유명한 자유간접화법이 발휘되는 순간인데, 이 갑작스러운 시점 이동을 통해 독자들은 잡다한 설명 없이도 늙은 대학생인 김 씨의 삶의 내력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리게 되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이 소설의 한 대목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였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된다”로 시작하는 이 자조적 탄식은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처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로 마무리됩니다.
「강」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수 있을 테지만 이 소설에 ‘강’은 나오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처지를 수는 없는 일이다’에 나오는 ‘템즈강’을 표제에 가장 근사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지요. 그렇다면 서정인 선생은 왜 이 소설의 제목으로 ‘강’을 선택한 걸까요? 왜 이 소설은 ‘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템즈강에 불을 지르다’의 원어 ‘burn the Themes’는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을 하다’라는 의미의 영어식 표현이랍니다. 서정인 선생은 영문학을 전공하시고 전북대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치신 경험이 있으시지요. 말하자면 작가의 지성과 개성이 발휘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지점은 이 소설의 출발점이자 주제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도도한 강물의 흐름으로 대변되는 시대적 굴레를 뛰어넘는 어떤 행위는 때로 미친 짓으로 손가락질받기도 하지만 대개 위대한 행위로 찬양되어왔지요. 우리는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을 ‘천재’ 혹은 ‘영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 시대의 분위기, 그것이 요구하는 역사적 명령을 거부하기 힘듭니다. 선생의 용법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모두가 역사의 강물 바깥으로 헤엄쳐 나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강」에 등장하는 세 사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적 행위를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그들은 시대의 물살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는 인물들일 뿐입니다. 세무서 주사 이 씨는 자신의 잇속을 차리기 바쁘고, 선생 박 씨는 그런 이 씨의 잔꾀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를 부러워하기만 하지요. 일견 지식인의 면모를 지니는 듯 보이는 늙은 대학생 김 씨마저 일찍이 모든 것을 체념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요. 그는 “출세할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어떠한 것도 주임교수의 인정을 받는 일보다 더 중요하지 않”으며 “외국에 가는 기회는 단 하나도 그의 시도를 받지 않고 지나치는 법이 없”는 사람입니다. ‘군하리’ 주민들은 어떨까요? 그들에게는 세 사내가 누리고 있는 도시적 삶의 애환이나 절망마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 일 장날이 되어서야 약간의 활기를 되찾는 ‘서울집’은 말할 것도 없고, 처조카를 데려다 잔심부름을 시키며 영업을 이어가는 여인숙 주인마저 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아요. 국가는 ‘농협’이 잘 되면 ‘농민’이 잘살게 된다며 장밋빛 희망을 주입하고 있지만, 정작 그 구호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간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이러한 사태는, 서정인 선생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처음 출발할 때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곳으로부터 사뭇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와 있”는 일이 아닐까요?
놀라운 것은 「강」이 이 시대적 불협화음의 현장을 재현하는 방식입니다. 서정인 선생은 당대 작가들에게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엄중한 선지자의 목소리나 비판적 지식인의 어투를 빌리지 않습니다. 선생은 이 초라하고 남루한 삶에 깃들어 있는 삶의 기미,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가슴 아픈 실존의 현장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포착해내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이 소설의 제목이 ‘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연유가 여기에 있는 듯해요. ‘강’은 세상사와 무관하게 유유하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자연의 표상, 즉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국가의 정책이나 구호와 무관하게 삶은 지속될 수밖에 없지요. 우리 모두는 ‘천재’나 ‘영웅’이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우리의 삶이 의미가 없지는 않을 거예요. 어떤 삶이든 그것 하나하나는 소중하고 남다른 것이 아닐 수 없어요. 「강」은 시대적 흐름 속에 소외된 채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반 소시민들의 옹색하고 초라한 삶을 어떠한 비판적 훈계도 없이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보듬으며 그러한 삶을 긍정하고 실존적 비애로 감쌉니다. 1960년대의 소설 가운데 ‘삶은 지속된다’라는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무엇이냐 물을 때 주저 없이 「강」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논점이 될 만한 요소에 대한 짧은 소견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해요. 소설의 결말 부분, ‘서울집’에서 나온 여자는 늙은 대학생이 잠든 방으로 들어가요. 고향도 처소도 명확하지 않은 떠돌이 술집 작부가 시골 마을에서 혼사를 치른 ‘신부’를 동경하고 ‘대학생’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는 이 장면은 당대 여성이 처한 현실을 아프게 보여주고 있지만, 요즘 독자들의 성정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그녀는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라는 대목에서 보이듯 여성성을 볼모로 시대의 환부를 가로지르려는 남성적 판타지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모두가 강물의 흐름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와중에 그녀 혼자만 잇속이나 계산과는 무관한 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어쩌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녀야말로 진정 ‘템즈강에 불을 지르는 행위’를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후 ‘이인실’이라는 여성의 한평생을 판소리의 리듬에 기대 되살려낸 실험적인 장편소설 『달궁』으로 이어지는 서정인 선생의 행보에 비추어보면,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가장 연약하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여성의 삶에 내재한 ‘은총’의 힘, 그 강력한 생명력의 근원을 애초부터 이 여성을 통해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요. 「강」과 선생의 후속작들을 변화의 요소를 통해서만 바라보지 않고 연속 선상에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얘깁니다. 「강」에 대한 새로운 독해가 필요하다는 말이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소설에 대한 기대를 배가시켜주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신수정/문학평론가·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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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욱 기자 donke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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