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
입력 2021.12.05 (21:30)
수정 2021.12.05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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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는 방송 작가였던 '내'가 탈북인 로기완의 이야기를 우연히 접하게 된 이후 벨기에서의 그의 행적을 쫓기 위해 브뤼셀에 도착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이동하고, 다시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유럽 땅에 당도하기까지, 로기완은 어떤 곳에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채 '추방당하는 자'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브뤼셀에서 어렵게 난민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이유로 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또다시 런던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로기완의 행적을 쫓는 '나'는 완전한 타인인 그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과도 온전히 마주하게 된다.
희귀병에 걸린 아들을 홀로 키우는 미혼모, 비만증을 앓고 있는 소녀, 산업재해로 다리를 잃은 외국인 노동자 등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사연을 미니 다큐로 만들어 방송을 내보내면서 전화로 후원을 받는 프로그램에서 '나'는 오랫동안 구성 작가로 일했다.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는 일을 하며 '나'는 연민과 공감, 죄책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 앞에서 그것을 대상화하여 자신의 현재를 위로하는 자기만족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이 소설이 '나'를 통해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고민이기도 하다.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 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자신의 감정이나 신념 혹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53쪽)라는 소설 속 문장을 읽으며, 나아가 로기완의 행적을 따라 그러한 과정을 실천해보고자 하는 '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소설의 독자들도 진정한 연민과 공감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나아가 삶의 이유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게 된다.
벨기에라는 낯선 땅에서 생존의 고통과 실존적 고독, 나아가 '자기 모욕'의 시간들을 견디고 있는 탈북인 로기완의 삶을 따라가보며 '내'가 결국 깨닫게 된 것은 무엇일까. 로기완이 묵었던 호텔, 그가 앉았던 자리, 그의 일기와 자술서, 그리고 그를 만났던 '박'의 이야기들을 통틀어보아도 로기완의 시간들이 '나'의 것으로 고스란히 감각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소설 속 문장을 빌리자면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늘 결핍된 대상"(124쪽)이라는 사실, 그리고 "누군가 나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는 것"(125쪽)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아간다. 타인의 삶은,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그들의 고통과 고독은, 언제나 단편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상상의 영역으로만 남게 된다. 물론, 타인의 고통에 완벽하게 공감할 수 없다는 이같은 불가능을 인정하려는 것이 조해진 소설의 최종 목적은 아니다.
삶의 불행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이 극대화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모종의 환멸과 죄책의 감정을 느꼈던 '나'는 로기완을 쫓아 벨기에로 떠나면서 "소설 같은 거"(14쪽)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생각한 '소설 같은 거'란 무엇일까. 한 편의 소설 안에서 우리는 한 인간의 행적을, 혹은 그의 내면을 촘촘히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잘 조직된 한 편의 소설 안에서도 한 인간의 삶이 온전히 이해되기는 힘들다. 누군가의 재현된 삶이란 결국 진짜 삶의 '단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소설을 읽을까. 이야기를 읽고 쓰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은 결국 상상의 영역으로만 남게 될 뿐인 타인의 삶일지라도 그것을 온전히 실감해보고자 애쓰는 인간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여 있는 인물들의 삶을,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고통들을 긴밀한 구성과 따뜻한 문장으로 직조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조해진의 소설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일의 불가능과 환멸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빛의 호위」같은 아름다운 소설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했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단순히 탈북인 로기완의 신산한 삶을 드러내기 위한 소설은 아닐 것이다. '내'가 로기완을 찾는 과정은, 자신이 맡았던 프로그램의 주인공이었던 '윤주'의 불행과 '나'의 죄책감을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아내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그녀를 안락사시킬 수밖에 없었던 의사 '박'의 남은 삶을 가늠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 스스로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으로서의 소설 쓰기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인간 삶의 고통과 고독에 대해서 말하는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조해진의 문장은 감각적으로 예리하고 윤리적으로 정확하다. 이 소설이 출간된 지도 이미 10년이 지났다. 그간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이성은 더 정교해졌지만, 그 감각은 오히려 더 무뎌져버렸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소설이자, 우리가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연정/문학평론가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는 방송 작가였던 '내'가 탈북인 로기완의 이야기를 우연히 접하게 된 이후 벨기에서의 그의 행적을 쫓기 위해 브뤼셀에 도착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이동하고, 다시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유럽 땅에 당도하기까지, 로기완은 어떤 곳에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채 '추방당하는 자'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브뤼셀에서 어렵게 난민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이유로 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또다시 런던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로기완의 행적을 쫓는 '나'는 완전한 타인인 그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과도 온전히 마주하게 된다.
희귀병에 걸린 아들을 홀로 키우는 미혼모, 비만증을 앓고 있는 소녀, 산업재해로 다리를 잃은 외국인 노동자 등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사연을 미니 다큐로 만들어 방송을 내보내면서 전화로 후원을 받는 프로그램에서 '나'는 오랫동안 구성 작가로 일했다.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는 일을 하며 '나'는 연민과 공감, 죄책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 앞에서 그것을 대상화하여 자신의 현재를 위로하는 자기만족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이 소설이 '나'를 통해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고민이기도 하다.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 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자신의 감정이나 신념 혹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53쪽)라는 소설 속 문장을 읽으며, 나아가 로기완의 행적을 따라 그러한 과정을 실천해보고자 하는 '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소설의 독자들도 진정한 연민과 공감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나아가 삶의 이유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게 된다.
벨기에라는 낯선 땅에서 생존의 고통과 실존적 고독, 나아가 '자기 모욕'의 시간들을 견디고 있는 탈북인 로기완의 삶을 따라가보며 '내'가 결국 깨닫게 된 것은 무엇일까. 로기완이 묵었던 호텔, 그가 앉았던 자리, 그의 일기와 자술서, 그리고 그를 만났던 '박'의 이야기들을 통틀어보아도 로기완의 시간들이 '나'의 것으로 고스란히 감각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소설 속 문장을 빌리자면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늘 결핍된 대상"(124쪽)이라는 사실, 그리고 "누군가 나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는 것"(125쪽)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아간다. 타인의 삶은,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그들의 고통과 고독은, 언제나 단편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상상의 영역으로만 남게 된다. 물론, 타인의 고통에 완벽하게 공감할 수 없다는 이같은 불가능을 인정하려는 것이 조해진 소설의 최종 목적은 아니다.
삶의 불행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이 극대화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모종의 환멸과 죄책의 감정을 느꼈던 '나'는 로기완을 쫓아 벨기에로 떠나면서 "소설 같은 거"(14쪽)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생각한 '소설 같은 거'란 무엇일까. 한 편의 소설 안에서 우리는 한 인간의 행적을, 혹은 그의 내면을 촘촘히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잘 조직된 한 편의 소설 안에서도 한 인간의 삶이 온전히 이해되기는 힘들다. 누군가의 재현된 삶이란 결국 진짜 삶의 '단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소설을 읽을까. 이야기를 읽고 쓰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은 결국 상상의 영역으로만 남게 될 뿐인 타인의 삶일지라도 그것을 온전히 실감해보고자 애쓰는 인간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여 있는 인물들의 삶을,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고통들을 긴밀한 구성과 따뜻한 문장으로 직조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조해진의 소설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일의 불가능과 환멸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빛의 호위」같은 아름다운 소설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했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단순히 탈북인 로기완의 신산한 삶을 드러내기 위한 소설은 아닐 것이다. '내'가 로기완을 찾는 과정은, 자신이 맡았던 프로그램의 주인공이었던 '윤주'의 불행과 '나'의 죄책감을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아내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그녀를 안락사시킬 수밖에 없었던 의사 '박'의 남은 삶을 가늠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 스스로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으로서의 소설 쓰기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인간 삶의 고통과 고독에 대해서 말하는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조해진의 문장은 감각적으로 예리하고 윤리적으로 정확하다. 이 소설이 출간된 지도 이미 10년이 지났다. 그간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이성은 더 정교해졌지만, 그 감각은 오히려 더 무뎌져버렸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소설이자, 우리가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연정/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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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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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12-05 21:30:09
- 수정2021-12-05 22:03:54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는 방송 작가였던 '내'가 탈북인 로기완의 이야기를 우연히 접하게 된 이후 벨기에서의 그의 행적을 쫓기 위해 브뤼셀에 도착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이동하고, 다시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유럽 땅에 당도하기까지, 로기완은 어떤 곳에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채 '추방당하는 자'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브뤼셀에서 어렵게 난민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이유로 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또다시 런던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로기완의 행적을 쫓는 '나'는 완전한 타인인 그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과도 온전히 마주하게 된다.
희귀병에 걸린 아들을 홀로 키우는 미혼모, 비만증을 앓고 있는 소녀, 산업재해로 다리를 잃은 외국인 노동자 등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사연을 미니 다큐로 만들어 방송을 내보내면서 전화로 후원을 받는 프로그램에서 '나'는 오랫동안 구성 작가로 일했다.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는 일을 하며 '나'는 연민과 공감, 죄책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 앞에서 그것을 대상화하여 자신의 현재를 위로하는 자기만족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이 소설이 '나'를 통해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고민이기도 하다.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 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자신의 감정이나 신념 혹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53쪽)라는 소설 속 문장을 읽으며, 나아가 로기완의 행적을 따라 그러한 과정을 실천해보고자 하는 '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소설의 독자들도 진정한 연민과 공감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나아가 삶의 이유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게 된다.
벨기에라는 낯선 땅에서 생존의 고통과 실존적 고독, 나아가 '자기 모욕'의 시간들을 견디고 있는 탈북인 로기완의 삶을 따라가보며 '내'가 결국 깨닫게 된 것은 무엇일까. 로기완이 묵었던 호텔, 그가 앉았던 자리, 그의 일기와 자술서, 그리고 그를 만났던 '박'의 이야기들을 통틀어보아도 로기완의 시간들이 '나'의 것으로 고스란히 감각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소설 속 문장을 빌리자면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늘 결핍된 대상"(124쪽)이라는 사실, 그리고 "누군가 나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는 것"(125쪽)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아간다. 타인의 삶은,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그들의 고통과 고독은, 언제나 단편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상상의 영역으로만 남게 된다. 물론, 타인의 고통에 완벽하게 공감할 수 없다는 이같은 불가능을 인정하려는 것이 조해진 소설의 최종 목적은 아니다.
삶의 불행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이 극대화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모종의 환멸과 죄책의 감정을 느꼈던 '나'는 로기완을 쫓아 벨기에로 떠나면서 "소설 같은 거"(14쪽)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생각한 '소설 같은 거'란 무엇일까. 한 편의 소설 안에서 우리는 한 인간의 행적을, 혹은 그의 내면을 촘촘히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잘 조직된 한 편의 소설 안에서도 한 인간의 삶이 온전히 이해되기는 힘들다. 누군가의 재현된 삶이란 결국 진짜 삶의 '단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소설을 읽을까. 이야기를 읽고 쓰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은 결국 상상의 영역으로만 남게 될 뿐인 타인의 삶일지라도 그것을 온전히 실감해보고자 애쓰는 인간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여 있는 인물들의 삶을,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고통들을 긴밀한 구성과 따뜻한 문장으로 직조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조해진의 소설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일의 불가능과 환멸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빛의 호위」같은 아름다운 소설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했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단순히 탈북인 로기완의 신산한 삶을 드러내기 위한 소설은 아닐 것이다. '내'가 로기완을 찾는 과정은, 자신이 맡았던 프로그램의 주인공이었던 '윤주'의 불행과 '나'의 죄책감을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아내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그녀를 안락사시킬 수밖에 없었던 의사 '박'의 남은 삶을 가늠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 스스로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으로서의 소설 쓰기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인간 삶의 고통과 고독에 대해서 말하는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조해진의 문장은 감각적으로 예리하고 윤리적으로 정확하다. 이 소설이 출간된 지도 이미 10년이 지났다. 그간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이성은 더 정교해졌지만, 그 감각은 오히려 더 무뎌져버렸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소설이자, 우리가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연정/문학평론가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는 방송 작가였던 '내'가 탈북인 로기완의 이야기를 우연히 접하게 된 이후 벨기에서의 그의 행적을 쫓기 위해 브뤼셀에 도착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이동하고, 다시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유럽 땅에 당도하기까지, 로기완은 어떤 곳에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채 '추방당하는 자'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브뤼셀에서 어렵게 난민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이유로 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또다시 런던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로기완의 행적을 쫓는 '나'는 완전한 타인인 그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과도 온전히 마주하게 된다.
희귀병에 걸린 아들을 홀로 키우는 미혼모, 비만증을 앓고 있는 소녀, 산업재해로 다리를 잃은 외국인 노동자 등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사연을 미니 다큐로 만들어 방송을 내보내면서 전화로 후원을 받는 프로그램에서 '나'는 오랫동안 구성 작가로 일했다.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는 일을 하며 '나'는 연민과 공감, 죄책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 앞에서 그것을 대상화하여 자신의 현재를 위로하는 자기만족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이 소설이 '나'를 통해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고민이기도 하다.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 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자신의 감정이나 신념 혹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53쪽)라는 소설 속 문장을 읽으며, 나아가 로기완의 행적을 따라 그러한 과정을 실천해보고자 하는 '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소설의 독자들도 진정한 연민과 공감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나아가 삶의 이유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게 된다.
벨기에라는 낯선 땅에서 생존의 고통과 실존적 고독, 나아가 '자기 모욕'의 시간들을 견디고 있는 탈북인 로기완의 삶을 따라가보며 '내'가 결국 깨닫게 된 것은 무엇일까. 로기완이 묵었던 호텔, 그가 앉았던 자리, 그의 일기와 자술서, 그리고 그를 만났던 '박'의 이야기들을 통틀어보아도 로기완의 시간들이 '나'의 것으로 고스란히 감각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소설 속 문장을 빌리자면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늘 결핍된 대상"(124쪽)이라는 사실, 그리고 "누군가 나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는 것"(125쪽)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아간다. 타인의 삶은,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그들의 고통과 고독은, 언제나 단편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상상의 영역으로만 남게 된다. 물론, 타인의 고통에 완벽하게 공감할 수 없다는 이같은 불가능을 인정하려는 것이 조해진 소설의 최종 목적은 아니다.
삶의 불행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이 극대화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모종의 환멸과 죄책의 감정을 느꼈던 '나'는 로기완을 쫓아 벨기에로 떠나면서 "소설 같은 거"(14쪽)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생각한 '소설 같은 거'란 무엇일까. 한 편의 소설 안에서 우리는 한 인간의 행적을, 혹은 그의 내면을 촘촘히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잘 조직된 한 편의 소설 안에서도 한 인간의 삶이 온전히 이해되기는 힘들다. 누군가의 재현된 삶이란 결국 진짜 삶의 '단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소설을 읽을까. 이야기를 읽고 쓰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은 결국 상상의 영역으로만 남게 될 뿐인 타인의 삶일지라도 그것을 온전히 실감해보고자 애쓰는 인간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여 있는 인물들의 삶을,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고통들을 긴밀한 구성과 따뜻한 문장으로 직조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조해진의 소설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일의 불가능과 환멸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빛의 호위」같은 아름다운 소설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했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단순히 탈북인 로기완의 신산한 삶을 드러내기 위한 소설은 아닐 것이다. '내'가 로기완을 찾는 과정은, 자신이 맡았던 프로그램의 주인공이었던 '윤주'의 불행과 '나'의 죄책감을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아내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그녀를 안락사시킬 수밖에 없었던 의사 '박'의 남은 삶을 가늠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 스스로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으로서의 소설 쓰기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인간 삶의 고통과 고독에 대해서 말하는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조해진의 문장은 감각적으로 예리하고 윤리적으로 정확하다. 이 소설이 출간된 지도 이미 10년이 지났다. 그간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이성은 더 정교해졌지만, 그 감각은 오히려 더 무뎌져버렸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소설이자, 우리가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연정/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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