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해학과 재치에 담긴 통렬한 아이러니…김애란 ‘달려라, 아비’

입력 2021.08.29 (21:39) 수정 2021.08.29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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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는 젊은 소설가로 갓 등단한 김애란이 2004년 만 24세의 나이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21세기라는 새로운 연대의 젊음의 풍속화를 탁월하게 그려내는 한 뛰어난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여고생으로 추정되는 화자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온 자신의 신산한 삶을 이야기하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에 대해서 상상한다. 산동네 반지하방에서 애인과 동거하던 가구공장 노동자인 아버지는 화자가 태어나기 전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화자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는 늘 달리고 있는 모습인데 이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때문에 생겨난 환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소극적이고 “어머니를 위해 한 번도 뛴 적이 없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허락받은 사랑의 기대에 몸이 달아 피임약을 사기 위해 전력으로 거리를 질주했던 그 날의 일을 화자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페이소스가 담긴 따뜻한 언어로 그려낸다.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아비’라고 부르면서 그의 달리기를 응원하는 딸의 마음은 ‘아비 없는’ 자식이 겪는 자신의 설움과 평생을 남편 없이 택시 기사로 일하면서 딸을 기르는 어머니의 고통을 한탄한다거나 원망하는 차원을 훌쩍 벗어난다. 그런 열악한 조건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삶을 올곧게 살아내는 계기로 전복시키는 것이다. 현대소설에서 아버지의 부재라거나 결손가정의 문제로 인한 좌절이나 일탈은 흔히 다루어지는데, 작가는 오히려 그 결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을 긍정하는 당찬 젊음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20세기 말의 민중소설들이 대개 민중의 고통스런 삶이나 이에 맞서는 투쟁을 그리는 방식으로 사회현실에 접근했다면, 김애란은 하층민의 비루한 삶을 그리면서도 연민이나 동정을 일체 배제하고, 이를 풍자와 해학에 담아낸다. 특히 이 작품을 비롯하여 첫 소설집에 같이 실린 여러 작품들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가차 없는 현실을 힘겹게 통과하고 있는 청년들의 정서에 밀착해서 그 척박한 삶의 환경과 그 속에서도 간직된 생명력을 발랄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김애란은 식민지 시대 소설가 김유정의 맥을 잇고 있는 해학과 풍자의 리얼리즘 작가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달려라, 아비>에서 아버지가 상상의 대상인 데 비해 화자의 삶과 긴밀하게 엮여 있고 깊은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어머니다. 평생 반지하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겨운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자신을 키운 어머니와의 관계는 친밀하면서도 평등한, 마치 ‘입석표처럼 당당한’ 그런 관계다. 또 어머니는 딸을 아비 없는 자식이지만 여기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누구보다도 속이 단단한 젊은 여성으로 단련시킨 인생의 스승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때로는 상스럽게 들리는 농담을 서슴지 않는데 그런 태도와 화법이 오히려 화자로 하여금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삶에 대한 경쾌하고 관조적인 시각을 습득하게 했다. “어머니는 우울에 빠진 내 뒷덜미를, 재치의 두 손가락을 이용해 가뿐히 잡아 올리곤 했다”고 화자는 쓰고 있다. 이 소설에서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순정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서 험한 세상 속에서 강인하게 하나뿐인 딸이 세상을 올곧게 살 수 있도록 키우는 이 시대의 억척어멈으로 그려진다.

어머니의 이 같은 태도는 삶을 바라보는 화자의 관조적이고도 명랑한 시선과 맺어져 있고 나아가서 작가 김애란이 세상을 보고 묘사하는 언어의 성격을 이루기도 한다. 현시대의 궁핍한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공감과 아울러 거리를 둔 관찰을 통해 그 양상을 가볍고 경쾌하게 다루지만 거기에 통렬한 아이러니가 동반된다. 또한, 유머스럽고 풍자적이고 때로는 재기 어린 농담으로 그런 고통스런 현실을 눙치거나 승화시킬 수 있는 지성이 뒷받침되고 있다.


김애란은 <달려라, 아비>를 비롯한 소설들을 통해 2000년대 우리 사회의 풍속화를 새로운 감각으로 그려냈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는 겉보기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더욱 공고해져서 틈새조차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전망이 닫힌 사회를 살고 있다. 젊은 세대의 이같이 척박한 일상적 삶을 핍진하게 그리면서도 세상살이의 비루함 속에서 면면히 이어지는 초월의 꿈을 포착하는 시선, 그것이 김애란의 작품세계가 지속적인 관심과 호소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윤지관 / 문학평론가·덕성여대 영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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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 해학과 재치에 담긴 통렬한 아이러니…김애란 ‘달려라, 아비’
    • 입력 2021-08-29 21:39:22
    • 수정2021-08-29 21:40:37
    취재K

<달려라, 아비>는 젊은 소설가로 갓 등단한 김애란이 2004년 만 24세의 나이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21세기라는 새로운 연대의 젊음의 풍속화를 탁월하게 그려내는 한 뛰어난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여고생으로 추정되는 화자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온 자신의 신산한 삶을 이야기하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에 대해서 상상한다. 산동네 반지하방에서 애인과 동거하던 가구공장 노동자인 아버지는 화자가 태어나기 전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화자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는 늘 달리고 있는 모습인데 이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때문에 생겨난 환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소극적이고 “어머니를 위해 한 번도 뛴 적이 없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허락받은 사랑의 기대에 몸이 달아 피임약을 사기 위해 전력으로 거리를 질주했던 그 날의 일을 화자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페이소스가 담긴 따뜻한 언어로 그려낸다.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아비’라고 부르면서 그의 달리기를 응원하는 딸의 마음은 ‘아비 없는’ 자식이 겪는 자신의 설움과 평생을 남편 없이 택시 기사로 일하면서 딸을 기르는 어머니의 고통을 한탄한다거나 원망하는 차원을 훌쩍 벗어난다. 그런 열악한 조건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삶을 올곧게 살아내는 계기로 전복시키는 것이다. 현대소설에서 아버지의 부재라거나 결손가정의 문제로 인한 좌절이나 일탈은 흔히 다루어지는데, 작가는 오히려 그 결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을 긍정하는 당찬 젊음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20세기 말의 민중소설들이 대개 민중의 고통스런 삶이나 이에 맞서는 투쟁을 그리는 방식으로 사회현실에 접근했다면, 김애란은 하층민의 비루한 삶을 그리면서도 연민이나 동정을 일체 배제하고, 이를 풍자와 해학에 담아낸다. 특히 이 작품을 비롯하여 첫 소설집에 같이 실린 여러 작품들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가차 없는 현실을 힘겹게 통과하고 있는 청년들의 정서에 밀착해서 그 척박한 삶의 환경과 그 속에서도 간직된 생명력을 발랄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김애란은 식민지 시대 소설가 김유정의 맥을 잇고 있는 해학과 풍자의 리얼리즘 작가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달려라, 아비>에서 아버지가 상상의 대상인 데 비해 화자의 삶과 긴밀하게 엮여 있고 깊은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어머니다. 평생 반지하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겨운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자신을 키운 어머니와의 관계는 친밀하면서도 평등한, 마치 ‘입석표처럼 당당한’ 그런 관계다. 또 어머니는 딸을 아비 없는 자식이지만 여기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누구보다도 속이 단단한 젊은 여성으로 단련시킨 인생의 스승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때로는 상스럽게 들리는 농담을 서슴지 않는데 그런 태도와 화법이 오히려 화자로 하여금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삶에 대한 경쾌하고 관조적인 시각을 습득하게 했다. “어머니는 우울에 빠진 내 뒷덜미를, 재치의 두 손가락을 이용해 가뿐히 잡아 올리곤 했다”고 화자는 쓰고 있다. 이 소설에서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순정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서 험한 세상 속에서 강인하게 하나뿐인 딸이 세상을 올곧게 살 수 있도록 키우는 이 시대의 억척어멈으로 그려진다.

어머니의 이 같은 태도는 삶을 바라보는 화자의 관조적이고도 명랑한 시선과 맺어져 있고 나아가서 작가 김애란이 세상을 보고 묘사하는 언어의 성격을 이루기도 한다. 현시대의 궁핍한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공감과 아울러 거리를 둔 관찰을 통해 그 양상을 가볍고 경쾌하게 다루지만 거기에 통렬한 아이러니가 동반된다. 또한, 유머스럽고 풍자적이고 때로는 재기 어린 농담으로 그런 고통스런 현실을 눙치거나 승화시킬 수 있는 지성이 뒷받침되고 있다.


김애란은 <달려라, 아비>를 비롯한 소설들을 통해 2000년대 우리 사회의 풍속화를 새로운 감각으로 그려냈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는 겉보기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더욱 공고해져서 틈새조차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전망이 닫힌 사회를 살고 있다. 젊은 세대의 이같이 척박한 일상적 삶을 핍진하게 그리면서도 세상살이의 비루함 속에서 면면히 이어지는 초월의 꿈을 포착하는 시선, 그것이 김애란의 작품세계가 지속적인 관심과 호소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윤지관 / 문학평론가·덕성여대 영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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