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시적 문장과 정교한 소설 형식으로 빚어낸 ‘아버지의 자리’…오탁번 ‘아버지와 치악산’
입력 2021.11.14 (21:36)
수정 2021.11.14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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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문장과 정교한 소설 형식으로 빚어 낸 '아버지의 자리'
---- 오탁번의 「아버지와 치악산」
오탁번의「아버지와 치악산」은 완벽하고 절대적인 아버지와 서툴고 부족한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부자간의 심층 심리를 날카롭게 그리면서 아버지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가는 부자간의 심리를 추적하고, 아버지의 권위에 드리워진 삶의 무게를 통찰하는 등 단편소설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스케일의 이야기와 묵직한 주제를 짧은 분량 안에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소설 형식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사건과 주제들을 함축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단편소설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품위와 권능을 모두 갖추고 늘 권위를 유지하는 아버지는 ‘치악산’에 비유된다.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미흡한 아들 ‘나’는 어렸을 땐 그 산이 무서웠는데, 성장한 지금은 그 산이 오염되고 속화되고 늙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산의 비유 관계를 통해 치악산의 변화는 아버지의 생물학적 노화와 그런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인식변화를 가리킨다. 같은 맥락에서 성장한 ‘나’의 직업적 일과는 아버지에 대한 ‘나’의 대결심리의 반영이다. 31살의 ‘나’는 가정을 꾸리고 군청의 산림계장이 되어 토요일마다 치악산으로 자연보호운동을 나가는데 그 일은 아버지에 대한 보호심리의 반영이며, 그 심리는 아버지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대결심리의 변화가 비유를 통해 압축적으로 전해진다.
작가가 잘 활용한 또 하나의 소설 형식은 인물의 대화이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심리적 변화는 물론 궁극적으로 이 소설이 담고 있는 가장 큰 이슈인 ‘아버지의 권위’는 부자간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의미가 예리하게 전해진다. 부자 사이의 대화는 단편소설의 특성상 많지도, 길지도 않다. 짧게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갈 뿐이지만, 그 안에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중 핵심 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괜찮다’이다. 아버지의 골절상을 치료하기 위해 큰 병원으로 가셔야만 한다는 공의의 말과, 그 말을 강조하는 ‘나’의 눈빛에 아버지는 ‘괜찮다’는 말로 응수한다. 짧고 단호한 이 한마디는 한 인물의 근엄하고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고, 고령에 다친 몸임에도 여전히 완벽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전하며, 동시에 모든 아픔과 외로움을 감수하는 자의 절대 고독을 보여준다. 완벽한 아버지상을 드러내는 이 외마디에 '나'는 부자간의 심한 차단감을 느끼며 아버지와의 대결에서 또다시 완패했다고 여기지만, 얼마 뒤에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게 된다. 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여선생의 말에 “괜찮습니다”라고 답변한 것이다. ‘나’의 응답은 아들의 보호를 거부하는 절대적인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그것은 ‘말’의 부전자전이 되어서 아버지의 유전자가 결국은 ‘나’의 혈액 속에 흐르고 있음을 암시하게 된다.
두 번째는 ‘감사해야지’이다. 매주 치악산으로 자연보호운동을 나간다는 ‘나’의 말에 아버지는 "자연을 보호할 생각을 말고 늘 감사해야지. 그러면 자연 풍치가 훼손되는 일도 없다"고 말한다. 아들을 향해 던지는 아버지의 이 말엔 ‘아버지상’에 대한 작가의 정의가 함축되어 있다. 아버지는 감사의 대상이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죽는 날까지 품위와 책임과 권위를 유지해야만 하는 버거운 운명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세 번째는 ‘혼자다’이다. 다친 아버지를 걱정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다”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이 고독한 육성은 아들이 아버지를 돌봄으로써 부자 사이는 ‘혼자’가 아니라는 ‘나’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늘 혼자였다. 부족한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기대했던 딸은 결혼 후엔 연락을 끊었다. 부자 사이에서 아버지는 늘 외로운 존재였다. 외로움은 아버지가 감당해야 하는 운명적 정서였던 것이다. 그렇게 지낸 아버지가 어느 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일을 당한다. 교장인 그는 불길 속을 뚫고 교장실로 들어가고, 결국 화마에 목숨을 잃는다. 화재가 난 학교의 교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교장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하는 아버지의 최후의 모습이다. 결국, 아버지는 불길 속에서 ‘혼자’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외로움은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까지 아버지의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자가 겪는 숙명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혼자’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나’는 혼탁한 세속에 빠져 지내느라 아버지가 죽어가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아버지 말대로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혼자’는 아버지됨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나’의 ‘혼자’는 아버지를 외면한 행동의 결과일 뿐이었다. 나도 ‘혼자’이긴 했지만, 그것은 ‘혼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채 이루어진, 자기 방기의 행동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다”라는 아버지의 점잖고 낮은 독백엔 외로움 속에 한없는 삶의 무게감과 책임감이 깔려 있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 소설은 결말에서 다시 한번 함축적인 인물의 행동을 보여주고, 극적인 반전을 도모하여 단편소설의 미학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화재 현장에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데, 그 속에서 ‘나’는 울지 않는다. ‘나’는 유해를 추리면서도 울지 않고, 그 날 오후 혼자 치악산으로 가 유해를 뿌리면서도 울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수습하고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는 동안에도 울지 않고 있는 것인데, 그러나 그 울음의 깊은 의미는 다르다. 전자가 아버지와의 대결의식의 잔재로서 울음기가 아예 없는 것이라면, 후자는 아버지의 자리를 비로소 온몸으로 체험하며 북받치는 감정의 상태로서 속으로는 울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혼자’가 되어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순간이야말로 ‘혼자’됨이 지닌 천근 같은 삶의 무게를 비로소 깨닫는 시간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의 유해를 다 뿌리고 산을 내려오면서 마침내 소리내어 울기 시작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하여 길게 이어지는 ‘나’의 통곡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비로소 ‘아버지의 자리’를 이해하게 되는 아들의 슬픈 운명을 절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권력의 속성을 다룬 소설은 많지만, 아버지의 권위를 다룬 소설은 드물다. 시대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의 상을 다룬 소설은 있어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근본적인 심층 심리와 보편적인 ‘아버지 권위’에 대해 성찰한 소설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소설사에서 희소한 주제를 정교한 단편소설의 형식 안에 완벽하게 육화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영원히 기억될 작품이다.
오탁번은 시, 소설, 동화 세 장르에 걸쳐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력의 작가이다. 그는 시와 소설을 넘나들 뿐만 아니라 두 장르의 형식을 작품 안에 잘 활용하였다. 그는 신춘문예 당선 시인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에서 회화적인 이미지 위에 서사적인 상상력을 결합시켜 독특한 구성의 시를 빚은 바 있다. 그리고 소설 「아버지와 치악산」에선 시적인 문장을 소설의 형식 안에 촘촘히 배치시켜 여러 겹의 소설적 의미를 만들어 냄으로써 단편소설의 미학을 한껏 끌어올렸다. 한 편의 단편 소설에서 개별 문장들이 일제히 주제를 향해 유기적으로 얽히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것은 이 소설을 읽으며 얻게 되는 특별한 즐거움의 하나이다.
고형진/문학평론가,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 오탁번의 「아버지와 치악산」
오탁번의「아버지와 치악산」은 완벽하고 절대적인 아버지와 서툴고 부족한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부자간의 심층 심리를 날카롭게 그리면서 아버지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가는 부자간의 심리를 추적하고, 아버지의 권위에 드리워진 삶의 무게를 통찰하는 등 단편소설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스케일의 이야기와 묵직한 주제를 짧은 분량 안에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소설 형식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사건과 주제들을 함축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단편소설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품위와 권능을 모두 갖추고 늘 권위를 유지하는 아버지는 ‘치악산’에 비유된다.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미흡한 아들 ‘나’는 어렸을 땐 그 산이 무서웠는데, 성장한 지금은 그 산이 오염되고 속화되고 늙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산의 비유 관계를 통해 치악산의 변화는 아버지의 생물학적 노화와 그런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인식변화를 가리킨다. 같은 맥락에서 성장한 ‘나’의 직업적 일과는 아버지에 대한 ‘나’의 대결심리의 반영이다. 31살의 ‘나’는 가정을 꾸리고 군청의 산림계장이 되어 토요일마다 치악산으로 자연보호운동을 나가는데 그 일은 아버지에 대한 보호심리의 반영이며, 그 심리는 아버지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대결심리의 변화가 비유를 통해 압축적으로 전해진다.
작가가 잘 활용한 또 하나의 소설 형식은 인물의 대화이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심리적 변화는 물론 궁극적으로 이 소설이 담고 있는 가장 큰 이슈인 ‘아버지의 권위’는 부자간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의미가 예리하게 전해진다. 부자 사이의 대화는 단편소설의 특성상 많지도, 길지도 않다. 짧게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갈 뿐이지만, 그 안에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중 핵심 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괜찮다’이다. 아버지의 골절상을 치료하기 위해 큰 병원으로 가셔야만 한다는 공의의 말과, 그 말을 강조하는 ‘나’의 눈빛에 아버지는 ‘괜찮다’는 말로 응수한다. 짧고 단호한 이 한마디는 한 인물의 근엄하고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고, 고령에 다친 몸임에도 여전히 완벽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전하며, 동시에 모든 아픔과 외로움을 감수하는 자의 절대 고독을 보여준다. 완벽한 아버지상을 드러내는 이 외마디에 '나'는 부자간의 심한 차단감을 느끼며 아버지와의 대결에서 또다시 완패했다고 여기지만, 얼마 뒤에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게 된다. 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여선생의 말에 “괜찮습니다”라고 답변한 것이다. ‘나’의 응답은 아들의 보호를 거부하는 절대적인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그것은 ‘말’의 부전자전이 되어서 아버지의 유전자가 결국은 ‘나’의 혈액 속에 흐르고 있음을 암시하게 된다.
두 번째는 ‘감사해야지’이다. 매주 치악산으로 자연보호운동을 나간다는 ‘나’의 말에 아버지는 "자연을 보호할 생각을 말고 늘 감사해야지. 그러면 자연 풍치가 훼손되는 일도 없다"고 말한다. 아들을 향해 던지는 아버지의 이 말엔 ‘아버지상’에 대한 작가의 정의가 함축되어 있다. 아버지는 감사의 대상이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죽는 날까지 품위와 책임과 권위를 유지해야만 하는 버거운 운명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세 번째는 ‘혼자다’이다. 다친 아버지를 걱정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다”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이 고독한 육성은 아들이 아버지를 돌봄으로써 부자 사이는 ‘혼자’가 아니라는 ‘나’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늘 혼자였다. 부족한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기대했던 딸은 결혼 후엔 연락을 끊었다. 부자 사이에서 아버지는 늘 외로운 존재였다. 외로움은 아버지가 감당해야 하는 운명적 정서였던 것이다. 그렇게 지낸 아버지가 어느 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일을 당한다. 교장인 그는 불길 속을 뚫고 교장실로 들어가고, 결국 화마에 목숨을 잃는다. 화재가 난 학교의 교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교장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하는 아버지의 최후의 모습이다. 결국, 아버지는 불길 속에서 ‘혼자’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외로움은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까지 아버지의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자가 겪는 숙명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혼자’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나’는 혼탁한 세속에 빠져 지내느라 아버지가 죽어가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아버지 말대로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혼자’는 아버지됨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나’의 ‘혼자’는 아버지를 외면한 행동의 결과일 뿐이었다. 나도 ‘혼자’이긴 했지만, 그것은 ‘혼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채 이루어진, 자기 방기의 행동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다”라는 아버지의 점잖고 낮은 독백엔 외로움 속에 한없는 삶의 무게감과 책임감이 깔려 있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 소설은 결말에서 다시 한번 함축적인 인물의 행동을 보여주고, 극적인 반전을 도모하여 단편소설의 미학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화재 현장에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데, 그 속에서 ‘나’는 울지 않는다. ‘나’는 유해를 추리면서도 울지 않고, 그 날 오후 혼자 치악산으로 가 유해를 뿌리면서도 울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수습하고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는 동안에도 울지 않고 있는 것인데, 그러나 그 울음의 깊은 의미는 다르다. 전자가 아버지와의 대결의식의 잔재로서 울음기가 아예 없는 것이라면, 후자는 아버지의 자리를 비로소 온몸으로 체험하며 북받치는 감정의 상태로서 속으로는 울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혼자’가 되어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순간이야말로 ‘혼자’됨이 지닌 천근 같은 삶의 무게를 비로소 깨닫는 시간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의 유해를 다 뿌리고 산을 내려오면서 마침내 소리내어 울기 시작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하여 길게 이어지는 ‘나’의 통곡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비로소 ‘아버지의 자리’를 이해하게 되는 아들의 슬픈 운명을 절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권력의 속성을 다룬 소설은 많지만, 아버지의 권위를 다룬 소설은 드물다. 시대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의 상을 다룬 소설은 있어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근본적인 심층 심리와 보편적인 ‘아버지 권위’에 대해 성찰한 소설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소설사에서 희소한 주제를 정교한 단편소설의 형식 안에 완벽하게 육화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영원히 기억될 작품이다.
오탁번은 시, 소설, 동화 세 장르에 걸쳐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력의 작가이다. 그는 시와 소설을 넘나들 뿐만 아니라 두 장르의 형식을 작품 안에 잘 활용하였다. 그는 신춘문예 당선 시인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에서 회화적인 이미지 위에 서사적인 상상력을 결합시켜 독특한 구성의 시를 빚은 바 있다. 그리고 소설 「아버지와 치악산」에선 시적인 문장을 소설의 형식 안에 촘촘히 배치시켜 여러 겹의 소설적 의미를 만들어 냄으로써 단편소설의 미학을 한껏 끌어올렸다. 한 편의 단편 소설에서 개별 문장들이 일제히 주제를 향해 유기적으로 얽히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것은 이 소설을 읽으며 얻게 되는 특별한 즐거움의 하나이다.
고형진/문학평론가,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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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문장과 정교한 소설 형식으로 빚어 낸 '아버지의 자리'
---- 오탁번의 「아버지와 치악산」
오탁번의「아버지와 치악산」은 완벽하고 절대적인 아버지와 서툴고 부족한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부자간의 심층 심리를 날카롭게 그리면서 아버지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가는 부자간의 심리를 추적하고, 아버지의 권위에 드리워진 삶의 무게를 통찰하는 등 단편소설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스케일의 이야기와 묵직한 주제를 짧은 분량 안에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소설 형식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사건과 주제들을 함축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단편소설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품위와 권능을 모두 갖추고 늘 권위를 유지하는 아버지는 ‘치악산’에 비유된다.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미흡한 아들 ‘나’는 어렸을 땐 그 산이 무서웠는데, 성장한 지금은 그 산이 오염되고 속화되고 늙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산의 비유 관계를 통해 치악산의 변화는 아버지의 생물학적 노화와 그런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인식변화를 가리킨다. 같은 맥락에서 성장한 ‘나’의 직업적 일과는 아버지에 대한 ‘나’의 대결심리의 반영이다. 31살의 ‘나’는 가정을 꾸리고 군청의 산림계장이 되어 토요일마다 치악산으로 자연보호운동을 나가는데 그 일은 아버지에 대한 보호심리의 반영이며, 그 심리는 아버지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대결심리의 변화가 비유를 통해 압축적으로 전해진다.
작가가 잘 활용한 또 하나의 소설 형식은 인물의 대화이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심리적 변화는 물론 궁극적으로 이 소설이 담고 있는 가장 큰 이슈인 ‘아버지의 권위’는 부자간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의미가 예리하게 전해진다. 부자 사이의 대화는 단편소설의 특성상 많지도, 길지도 않다. 짧게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갈 뿐이지만, 그 안에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중 핵심 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괜찮다’이다. 아버지의 골절상을 치료하기 위해 큰 병원으로 가셔야만 한다는 공의의 말과, 그 말을 강조하는 ‘나’의 눈빛에 아버지는 ‘괜찮다’는 말로 응수한다. 짧고 단호한 이 한마디는 한 인물의 근엄하고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고, 고령에 다친 몸임에도 여전히 완벽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전하며, 동시에 모든 아픔과 외로움을 감수하는 자의 절대 고독을 보여준다. 완벽한 아버지상을 드러내는 이 외마디에 '나'는 부자간의 심한 차단감을 느끼며 아버지와의 대결에서 또다시 완패했다고 여기지만, 얼마 뒤에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게 된다. 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여선생의 말에 “괜찮습니다”라고 답변한 것이다. ‘나’의 응답은 아들의 보호를 거부하는 절대적인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그것은 ‘말’의 부전자전이 되어서 아버지의 유전자가 결국은 ‘나’의 혈액 속에 흐르고 있음을 암시하게 된다.
두 번째는 ‘감사해야지’이다. 매주 치악산으로 자연보호운동을 나간다는 ‘나’의 말에 아버지는 "자연을 보호할 생각을 말고 늘 감사해야지. 그러면 자연 풍치가 훼손되는 일도 없다"고 말한다. 아들을 향해 던지는 아버지의 이 말엔 ‘아버지상’에 대한 작가의 정의가 함축되어 있다. 아버지는 감사의 대상이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죽는 날까지 품위와 책임과 권위를 유지해야만 하는 버거운 운명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세 번째는 ‘혼자다’이다. 다친 아버지를 걱정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다”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이 고독한 육성은 아들이 아버지를 돌봄으로써 부자 사이는 ‘혼자’가 아니라는 ‘나’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늘 혼자였다. 부족한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기대했던 딸은 결혼 후엔 연락을 끊었다. 부자 사이에서 아버지는 늘 외로운 존재였다. 외로움은 아버지가 감당해야 하는 운명적 정서였던 것이다. 그렇게 지낸 아버지가 어느 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일을 당한다. 교장인 그는 불길 속을 뚫고 교장실로 들어가고, 결국 화마에 목숨을 잃는다. 화재가 난 학교의 교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교장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하는 아버지의 최후의 모습이다. 결국, 아버지는 불길 속에서 ‘혼자’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외로움은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까지 아버지의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자가 겪는 숙명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혼자’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나’는 혼탁한 세속에 빠져 지내느라 아버지가 죽어가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아버지 말대로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혼자’는 아버지됨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나’의 ‘혼자’는 아버지를 외면한 행동의 결과일 뿐이었다. 나도 ‘혼자’이긴 했지만, 그것은 ‘혼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채 이루어진, 자기 방기의 행동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다”라는 아버지의 점잖고 낮은 독백엔 외로움 속에 한없는 삶의 무게감과 책임감이 깔려 있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 소설은 결말에서 다시 한번 함축적인 인물의 행동을 보여주고, 극적인 반전을 도모하여 단편소설의 미학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화재 현장에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데, 그 속에서 ‘나’는 울지 않는다. ‘나’는 유해를 추리면서도 울지 않고, 그 날 오후 혼자 치악산으로 가 유해를 뿌리면서도 울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수습하고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는 동안에도 울지 않고 있는 것인데, 그러나 그 울음의 깊은 의미는 다르다. 전자가 아버지와의 대결의식의 잔재로서 울음기가 아예 없는 것이라면, 후자는 아버지의 자리를 비로소 온몸으로 체험하며 북받치는 감정의 상태로서 속으로는 울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혼자’가 되어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순간이야말로 ‘혼자’됨이 지닌 천근 같은 삶의 무게를 비로소 깨닫는 시간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의 유해를 다 뿌리고 산을 내려오면서 마침내 소리내어 울기 시작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하여 길게 이어지는 ‘나’의 통곡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비로소 ‘아버지의 자리’를 이해하게 되는 아들의 슬픈 운명을 절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권력의 속성을 다룬 소설은 많지만, 아버지의 권위를 다룬 소설은 드물다. 시대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의 상을 다룬 소설은 있어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근본적인 심층 심리와 보편적인 ‘아버지 권위’에 대해 성찰한 소설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소설사에서 희소한 주제를 정교한 단편소설의 형식 안에 완벽하게 육화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영원히 기억될 작품이다.
오탁번은 시, 소설, 동화 세 장르에 걸쳐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력의 작가이다. 그는 시와 소설을 넘나들 뿐만 아니라 두 장르의 형식을 작품 안에 잘 활용하였다. 그는 신춘문예 당선 시인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에서 회화적인 이미지 위에 서사적인 상상력을 결합시켜 독특한 구성의 시를 빚은 바 있다. 그리고 소설 「아버지와 치악산」에선 시적인 문장을 소설의 형식 안에 촘촘히 배치시켜 여러 겹의 소설적 의미를 만들어 냄으로써 단편소설의 미학을 한껏 끌어올렸다. 한 편의 단편 소설에서 개별 문장들이 일제히 주제를 향해 유기적으로 얽히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것은 이 소설을 읽으며 얻게 되는 특별한 즐거움의 하나이다.
고형진/문학평론가,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 오탁번의 「아버지와 치악산」
오탁번의「아버지와 치악산」은 완벽하고 절대적인 아버지와 서툴고 부족한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부자간의 심층 심리를 날카롭게 그리면서 아버지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가는 부자간의 심리를 추적하고, 아버지의 권위에 드리워진 삶의 무게를 통찰하는 등 단편소설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스케일의 이야기와 묵직한 주제를 짧은 분량 안에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소설 형식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사건과 주제들을 함축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단편소설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품위와 권능을 모두 갖추고 늘 권위를 유지하는 아버지는 ‘치악산’에 비유된다.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미흡한 아들 ‘나’는 어렸을 땐 그 산이 무서웠는데, 성장한 지금은 그 산이 오염되고 속화되고 늙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산의 비유 관계를 통해 치악산의 변화는 아버지의 생물학적 노화와 그런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인식변화를 가리킨다. 같은 맥락에서 성장한 ‘나’의 직업적 일과는 아버지에 대한 ‘나’의 대결심리의 반영이다. 31살의 ‘나’는 가정을 꾸리고 군청의 산림계장이 되어 토요일마다 치악산으로 자연보호운동을 나가는데 그 일은 아버지에 대한 보호심리의 반영이며, 그 심리는 아버지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대결심리의 변화가 비유를 통해 압축적으로 전해진다.
작가가 잘 활용한 또 하나의 소설 형식은 인물의 대화이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심리적 변화는 물론 궁극적으로 이 소설이 담고 있는 가장 큰 이슈인 ‘아버지의 권위’는 부자간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의미가 예리하게 전해진다. 부자 사이의 대화는 단편소설의 특성상 많지도, 길지도 않다. 짧게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갈 뿐이지만, 그 안에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중 핵심 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괜찮다’이다. 아버지의 골절상을 치료하기 위해 큰 병원으로 가셔야만 한다는 공의의 말과, 그 말을 강조하는 ‘나’의 눈빛에 아버지는 ‘괜찮다’는 말로 응수한다. 짧고 단호한 이 한마디는 한 인물의 근엄하고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고, 고령에 다친 몸임에도 여전히 완벽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전하며, 동시에 모든 아픔과 외로움을 감수하는 자의 절대 고독을 보여준다. 완벽한 아버지상을 드러내는 이 외마디에 '나'는 부자간의 심한 차단감을 느끼며 아버지와의 대결에서 또다시 완패했다고 여기지만, 얼마 뒤에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게 된다. 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여선생의 말에 “괜찮습니다”라고 답변한 것이다. ‘나’의 응답은 아들의 보호를 거부하는 절대적인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그것은 ‘말’의 부전자전이 되어서 아버지의 유전자가 결국은 ‘나’의 혈액 속에 흐르고 있음을 암시하게 된다.
두 번째는 ‘감사해야지’이다. 매주 치악산으로 자연보호운동을 나간다는 ‘나’의 말에 아버지는 "자연을 보호할 생각을 말고 늘 감사해야지. 그러면 자연 풍치가 훼손되는 일도 없다"고 말한다. 아들을 향해 던지는 아버지의 이 말엔 ‘아버지상’에 대한 작가의 정의가 함축되어 있다. 아버지는 감사의 대상이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죽는 날까지 품위와 책임과 권위를 유지해야만 하는 버거운 운명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세 번째는 ‘혼자다’이다. 다친 아버지를 걱정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다”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이 고독한 육성은 아들이 아버지를 돌봄으로써 부자 사이는 ‘혼자’가 아니라는 ‘나’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늘 혼자였다. 부족한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기대했던 딸은 결혼 후엔 연락을 끊었다. 부자 사이에서 아버지는 늘 외로운 존재였다. 외로움은 아버지가 감당해야 하는 운명적 정서였던 것이다. 그렇게 지낸 아버지가 어느 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일을 당한다. 교장인 그는 불길 속을 뚫고 교장실로 들어가고, 결국 화마에 목숨을 잃는다. 화재가 난 학교의 교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교장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하는 아버지의 최후의 모습이다. 결국, 아버지는 불길 속에서 ‘혼자’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외로움은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까지 아버지의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자가 겪는 숙명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혼자’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나’는 혼탁한 세속에 빠져 지내느라 아버지가 죽어가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아버지 말대로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혼자’는 아버지됨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나’의 ‘혼자’는 아버지를 외면한 행동의 결과일 뿐이었다. 나도 ‘혼자’이긴 했지만, 그것은 ‘혼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채 이루어진, 자기 방기의 행동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다”라는 아버지의 점잖고 낮은 독백엔 외로움 속에 한없는 삶의 무게감과 책임감이 깔려 있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 소설은 결말에서 다시 한번 함축적인 인물의 행동을 보여주고, 극적인 반전을 도모하여 단편소설의 미학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화재 현장에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데, 그 속에서 ‘나’는 울지 않는다. ‘나’는 유해를 추리면서도 울지 않고, 그 날 오후 혼자 치악산으로 가 유해를 뿌리면서도 울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수습하고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는 동안에도 울지 않고 있는 것인데, 그러나 그 울음의 깊은 의미는 다르다. 전자가 아버지와의 대결의식의 잔재로서 울음기가 아예 없는 것이라면, 후자는 아버지의 자리를 비로소 온몸으로 체험하며 북받치는 감정의 상태로서 속으로는 울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혼자’가 되어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순간이야말로 ‘혼자’됨이 지닌 천근 같은 삶의 무게를 비로소 깨닫는 시간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의 유해를 다 뿌리고 산을 내려오면서 마침내 소리내어 울기 시작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하여 길게 이어지는 ‘나’의 통곡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비로소 ‘아버지의 자리’를 이해하게 되는 아들의 슬픈 운명을 절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권력의 속성을 다룬 소설은 많지만, 아버지의 권위를 다룬 소설은 드물다. 시대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의 상을 다룬 소설은 있어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근본적인 심층 심리와 보편적인 ‘아버지 권위’에 대해 성찰한 소설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소설사에서 희소한 주제를 정교한 단편소설의 형식 안에 완벽하게 육화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영원히 기억될 작품이다.
오탁번은 시, 소설, 동화 세 장르에 걸쳐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력의 작가이다. 그는 시와 소설을 넘나들 뿐만 아니라 두 장르의 형식을 작품 안에 잘 활용하였다. 그는 신춘문예 당선 시인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에서 회화적인 이미지 위에 서사적인 상상력을 결합시켜 독특한 구성의 시를 빚은 바 있다. 그리고 소설 「아버지와 치악산」에선 시적인 문장을 소설의 형식 안에 촘촘히 배치시켜 여러 겹의 소설적 의미를 만들어 냄으로써 단편소설의 미학을 한껏 끌어올렸다. 한 편의 단편 소설에서 개별 문장들이 일제히 주제를 향해 유기적으로 얽히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것은 이 소설을 읽으며 얻게 되는 특별한 즐거움의 하나이다.
고형진/문학평론가,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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