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전쟁의 폭력성과 치유의 문학…윤흥길 ‘장마’

입력 2022.01.02 (21:30) 수정 2022.01.02 (21:3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전쟁의 폭력성과 치유의 문학

1.
「장마」(1973)는 길고 지루하게 내리는 비를 뜻하는 ‘장마’를 은유적으로 차용한 소설이다. ‘장마’는 표면적으로 인물과 사건의 배경을 이루는 소재이지만, 동시에 6·25라는 민족사의 비극을 암시하는 은유로 기능한다. 장마는 언젠가는 그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장마가 그치고 나면 곧 맑은 하늘과 평화로운 생활이 다시 열릴 것이라는 정상에 대한 강한 믿음을 내재한다. 작가는 장마의 이런 특성에 착안하여 이데올로기로 인한 갈등과 참상을 환기하고 치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래서 작품은 장마철과도 같은 음습하고 답답한 분위기로 채워져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장마가 빨리 끝나기를 기대하는 인물들의 바람을 보여준다. 작품 말미에서 서사의 종결과 더불어 어린 화자가 “길고 지루한 장마였다”고 진술하는 것은 그러한 심경을 표현한 것이다.

2.
「장마」를 읽으면서 먼저 마주하는 것은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문장이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는 구절처럼, 윤흥길은 주변 사물을 보고 만지듯이 묘사하는 감각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거기다가 천진한 어린이의 눈을 통해서 주변을 관찰하고 서술한다. 어린이는 주위 사물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보고 거짓 없는 마음으로 수용하는 존재들이다. 작품에서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갈등이 사실적으로 포착된 것이나 빨치산이 된 삼촌의 변화된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지는 것은 모두 초등학교 3학년인 동준의 시선에 의한 것이고, 작가는 이 순진한 어린이의 시선을 빌어서 복잡한 성인들의 세계를 명료한 형태로 포착해 낸다.

작품에서 서사적 중심을 이루는 것은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갈등이다. 두 할머니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굳이 서로를 미워할 이유가 없는 돈독한 사돈지간이었다. 할머니는 전쟁과 함께 서울에서 피란 온 외할머니 식구들에게 사랑방을 내주면서 서로 의지하며 살자고 위로했던 그런 사이였다. 하지만 그런 관계도 잠시뿐 이내 서로를 원수처럼 미워하는데, 그것은 공교롭게도 인민군이 북으로 밀려나고 국군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면서부터다. 외할머니의 아들 즉 화자의 외삼촌은 국군에 입대해서 장교가 되었고, 할머니의 아들인 삼촌은 빨치산이 되어 산속을 방황하는 상황에서 돌연 외삼촌의 전사통지서가 날아든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 외할머니는 원수라도 갚을 듯이 빨갱이에 대한 저주를 쏟아낸다.


“더 쏟아져라! 어서 한번 더 쏟아져서 바웃새에 숨은 뿔갱이 마자 다 씰어가그라! 나무 틈새기에 엎딘 뿔갱이 숯뎅이같이 싹싹 끄실러라! 한번 더, 한번 더, 옳지! 하늘님 고오맙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주는 빨갱이 자식을 둔 할머니에게는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 비수로 작용한다는 데 있다. 어느 하나를 편들면 다른 하나를 부정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 작가가 포착한 분단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서로를 적대시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면서도 적대하고 부정하게 만든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곧 6·25전쟁이고, 그것을 두 할머니의 반목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다. 작품에서 사실적으로 그려졌듯이, 이데올로기는 사람 관계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성마저 황폐하게 변질시켰다. 남의 일에도 곧잘 뛰어들어 흥분하고 감동 잘하는 천진한 성격의 삼촌이 빨치산이 된 이후에는 차분한 설교조의 말씨에다 야비한 복수 행위마저 서슴지 않는 거친 인물이 되었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남한과 북한이 충돌하고 6·25라는 극단의 대립을 보였듯이, 이데올로기는 돈독했던 사돈 관계마저 유린한 것이다.

「장마」의 문제성은 무엇보다 반목하던 두 할머니가 화해한다는 데 있다. 그 계기가 되는 것이 주술행위이다. 소경 점쟁이는 아들이 언제 나타날 것이라고 예견하고, 할머니는 그것을 신앙처럼 믿으며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점쟁이가 예견한 시간에 삼촌 대신에 구렁이가 출현하자 할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직감하고 졸도하며, 그 혼란을 외할머니가 나서서 수습한다. 억울하게 죽은 아들이 어머니를 잊지 못해 구렁이가 되어 집안으로 찾아들었다는 듯이 외할머니는 미리 정해 놓은 순서라도 밟듯이 침착한 태도로 혼란을 수습해 나간다. 음식을 차리고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태워서 구렁이가 나무에서 내려와 대나무 숲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 곧 길을 잃은 삼촌의 넋을 제 길로 인도하는 진혼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자네 오면 줄라고 노친께서 여러 날 들어 장만헌 것일세. 먹지는 못헐망정 눈요구라도 허고 가소. 다아 자네 노친 정성 아닌가. 내가 자네를 쫓을라고 이러는 건 아니네. 그것만은 자네도 알어야 되네. 남새가 나드라도 너무 섭섭타 생각 말고, 집안일일랑 아모 걱정 말고 머언 걸음 부데 펜안히 가소.”

이 비통한 제의를 전해 들은 할머니는 외할머니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마침내 서로를 용납하는 공감대를 마련한다. 두 할머니를 갈라놓은 이데올로기란 사실은 민족의 근원적 정서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장마」를 분단문학의 중요한 성과로 보는 것은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준 데 있다. 분단문학이란 분단 현실을 문제 삼고 그 상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은 문학이라고 한다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야기된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문제 삼고 그것을 치유하려는 노력은 중요하게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윤흥길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지적하면서 민중의 근원적 정서를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물론, 샤머니즘적 방법을 통해서 이념적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를 도모한 것은 현실성이 약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지만, 윤흥길이 주목한 것이 주술행위가 아니라 그로 표현된 민족의 동질성이라는 것을 감안하자면 작가의 지적은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 주술 행위의 이면에는 모정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외할머니의 꿈에 대한 맹신이나 빨갱이에 대한 저주는 본능적인 모성의 표현이고, 할머니의 점술에 대한 믿음 역시 자식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이 모성을 통해서 외래적 이념을 물리치고 균열된 관계를 복원하자는 게 작가의 전언인 바, 이는 이 작품이 획득한 고유의 성과이다.

3.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소설은 지루한 장마가 끝났다는 이 마지막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소설 속의 장마는 끝이 났지만, 이념 대립과 분단의 현실은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 속의 장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북한의 이질화가 심화되고 통일에 대한 염원이 약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마」가 의미를 갖는 것은 이런 문제의식이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 있다.

강진호(문학평론가,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비평] 전쟁의 폭력성과 치유의 문학…윤흥길 ‘장마’
    • 입력 2022-01-02 21:30:22
    • 수정2022-01-02 21:32:58
    취재K
전쟁의 폭력성과 치유의 문학

1.
「장마」(1973)는 길고 지루하게 내리는 비를 뜻하는 ‘장마’를 은유적으로 차용한 소설이다. ‘장마’는 표면적으로 인물과 사건의 배경을 이루는 소재이지만, 동시에 6·25라는 민족사의 비극을 암시하는 은유로 기능한다. 장마는 언젠가는 그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장마가 그치고 나면 곧 맑은 하늘과 평화로운 생활이 다시 열릴 것이라는 정상에 대한 강한 믿음을 내재한다. 작가는 장마의 이런 특성에 착안하여 이데올로기로 인한 갈등과 참상을 환기하고 치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래서 작품은 장마철과도 같은 음습하고 답답한 분위기로 채워져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장마가 빨리 끝나기를 기대하는 인물들의 바람을 보여준다. 작품 말미에서 서사의 종결과 더불어 어린 화자가 “길고 지루한 장마였다”고 진술하는 것은 그러한 심경을 표현한 것이다.

2.
「장마」를 읽으면서 먼저 마주하는 것은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문장이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는 구절처럼, 윤흥길은 주변 사물을 보고 만지듯이 묘사하는 감각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거기다가 천진한 어린이의 눈을 통해서 주변을 관찰하고 서술한다. 어린이는 주위 사물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보고 거짓 없는 마음으로 수용하는 존재들이다. 작품에서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갈등이 사실적으로 포착된 것이나 빨치산이 된 삼촌의 변화된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지는 것은 모두 초등학교 3학년인 동준의 시선에 의한 것이고, 작가는 이 순진한 어린이의 시선을 빌어서 복잡한 성인들의 세계를 명료한 형태로 포착해 낸다.

작품에서 서사적 중심을 이루는 것은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갈등이다. 두 할머니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굳이 서로를 미워할 이유가 없는 돈독한 사돈지간이었다. 할머니는 전쟁과 함께 서울에서 피란 온 외할머니 식구들에게 사랑방을 내주면서 서로 의지하며 살자고 위로했던 그런 사이였다. 하지만 그런 관계도 잠시뿐 이내 서로를 원수처럼 미워하는데, 그것은 공교롭게도 인민군이 북으로 밀려나고 국군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면서부터다. 외할머니의 아들 즉 화자의 외삼촌은 국군에 입대해서 장교가 되었고, 할머니의 아들인 삼촌은 빨치산이 되어 산속을 방황하는 상황에서 돌연 외삼촌의 전사통지서가 날아든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 외할머니는 원수라도 갚을 듯이 빨갱이에 대한 저주를 쏟아낸다.


“더 쏟아져라! 어서 한번 더 쏟아져서 바웃새에 숨은 뿔갱이 마자 다 씰어가그라! 나무 틈새기에 엎딘 뿔갱이 숯뎅이같이 싹싹 끄실러라! 한번 더, 한번 더, 옳지! 하늘님 고오맙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주는 빨갱이 자식을 둔 할머니에게는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 비수로 작용한다는 데 있다. 어느 하나를 편들면 다른 하나를 부정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 작가가 포착한 분단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서로를 적대시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면서도 적대하고 부정하게 만든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곧 6·25전쟁이고, 그것을 두 할머니의 반목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다. 작품에서 사실적으로 그려졌듯이, 이데올로기는 사람 관계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성마저 황폐하게 변질시켰다. 남의 일에도 곧잘 뛰어들어 흥분하고 감동 잘하는 천진한 성격의 삼촌이 빨치산이 된 이후에는 차분한 설교조의 말씨에다 야비한 복수 행위마저 서슴지 않는 거친 인물이 되었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남한과 북한이 충돌하고 6·25라는 극단의 대립을 보였듯이, 이데올로기는 돈독했던 사돈 관계마저 유린한 것이다.

「장마」의 문제성은 무엇보다 반목하던 두 할머니가 화해한다는 데 있다. 그 계기가 되는 것이 주술행위이다. 소경 점쟁이는 아들이 언제 나타날 것이라고 예견하고, 할머니는 그것을 신앙처럼 믿으며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점쟁이가 예견한 시간에 삼촌 대신에 구렁이가 출현하자 할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직감하고 졸도하며, 그 혼란을 외할머니가 나서서 수습한다. 억울하게 죽은 아들이 어머니를 잊지 못해 구렁이가 되어 집안으로 찾아들었다는 듯이 외할머니는 미리 정해 놓은 순서라도 밟듯이 침착한 태도로 혼란을 수습해 나간다. 음식을 차리고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태워서 구렁이가 나무에서 내려와 대나무 숲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 곧 길을 잃은 삼촌의 넋을 제 길로 인도하는 진혼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자네 오면 줄라고 노친께서 여러 날 들어 장만헌 것일세. 먹지는 못헐망정 눈요구라도 허고 가소. 다아 자네 노친 정성 아닌가. 내가 자네를 쫓을라고 이러는 건 아니네. 그것만은 자네도 알어야 되네. 남새가 나드라도 너무 섭섭타 생각 말고, 집안일일랑 아모 걱정 말고 머언 걸음 부데 펜안히 가소.”

이 비통한 제의를 전해 들은 할머니는 외할머니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마침내 서로를 용납하는 공감대를 마련한다. 두 할머니를 갈라놓은 이데올로기란 사실은 민족의 근원적 정서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장마」를 분단문학의 중요한 성과로 보는 것은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준 데 있다. 분단문학이란 분단 현실을 문제 삼고 그 상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은 문학이라고 한다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야기된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문제 삼고 그것을 치유하려는 노력은 중요하게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윤흥길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지적하면서 민중의 근원적 정서를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물론, 샤머니즘적 방법을 통해서 이념적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를 도모한 것은 현실성이 약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지만, 윤흥길이 주목한 것이 주술행위가 아니라 그로 표현된 민족의 동질성이라는 것을 감안하자면 작가의 지적은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 주술 행위의 이면에는 모정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외할머니의 꿈에 대한 맹신이나 빨갱이에 대한 저주는 본능적인 모성의 표현이고, 할머니의 점술에 대한 믿음 역시 자식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이 모성을 통해서 외래적 이념을 물리치고 균열된 관계를 복원하자는 게 작가의 전언인 바, 이는 이 작품이 획득한 고유의 성과이다.

3.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소설은 지루한 장마가 끝났다는 이 마지막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소설 속의 장마는 끝이 났지만, 이념 대립과 분단의 현실은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 속의 장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북한의 이질화가 심화되고 통일에 대한 염원이 약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마」가 의미를 갖는 것은 이런 문제의식이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 있다.

강진호(문학평론가,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시리즈

우리 시대의 소설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