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시대의 이야기꾼 황석영 “내 장르는 민담 리얼리즘”
입력 2021.08.22 (21:30)
수정 2021.08.2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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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소설가
Q. <손님>의 집필 과정은?
1993년에 귀국을 해서 들어오자마자 구속돼서 5년 동안 징역을 살았잖아요. 그 사이에 그 안에서 집필권을 줬으면 진작 썼을텐데 집필권을 안줬으니까. 그래서 1998년에 석방이 됐고, 그리고 나오자마자 이것을 쓰려고 자료도 펼쳐보고 노트도 하고 시작을 했는데 안되더라고. 작가로 돌아올 준비가 안됐던 것 같아요. 한 15년 공백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주변에서는 농담 삼아서 '황석영이 이제 끝났다, 못돌아온다.' 15년 동안 아무것도 안했으니까. <오래된 정원>을 다 쓰고 나니까, 출판하고 나니까 좀 준비가 되더라고 심리적으로. 그래서 쓰기 시작했는데, 마침 2000년이면 한국전쟁 50주년이에요. 이게 맞아떨어졌어요. 그래서 그 무렵에 발표하게 된 거죠.
Q.왜 '황해도 신천 학살'에 주목했나?
그 사실 자체로도 굉장히 압도적이에요. 당시 6만여명의 군민이 있었는데 절반인 3만여명이 학살을 당했단 말이죠.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아마 제주 4.3을 빼놓고는, 그래도 제주는 제법 넓은 지역이잖아요. 일개 농촌 군이라는 곳에서 절반 정도의 인구가 학살됐다는 것이 굉장히 충격적인데. 거기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가 (신천을) 방문하고 나와서 우연히 신천 학살에 대해서 물어보면, 다 의견이 엇갈리는데, 일본에서 정경모 선생이 자기가 갖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미군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그랬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거죠. 굉장히 거기에 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게 우리끼리 한 짓이로구나.
Q. 1989년 방북 당시 황해도 신천군도 방문했는데...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원적이 명시돼 있어요. 지금은 호적제도가 없어졌지만 원적지에 뭐라고 돼 있냐면 황해도 신천군 온정면 온천리 103번지야. 그러니까 아버지의 고향이 신천인 셈이에요. 신천 근방에 250년된 황 씨 집성촌이 있어요. 거기 어디였겠지. 감회는 별로 없고 그러나 내면에서 '아 우리 조성이 몇 대에 걸쳐서 오랫동안 살던 곳이다' 이런 느낌은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향수라든가 이산의 아픔이라든가 이런 게 들어간 것이 아니고, 나는 신천 학살이란 팩트 자체를 놓고 동아시아의 근대를 탐구했다 그럴까. 그런 면이 있는 거예요.
Q. <손님>은 '신천 학살'을 충실히 묘사했나?
거기에 묘사된 내용이나 증언이나 이런 것들은 (사실보다) 많이 축소한 거예요. 사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많았는데. 6만이 살면 저게 뉘 집 딸인지 뉘 집 아들인지 서로 다 알아요. 그런 사람들, 담 너머로 서로 장 나눠먹고 서로 지나가다 들밥 먹으라 그러면 같이 어울려서 밥 먹고, 경조사가 되면 같이 가서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50일의 짧은 기간에 서로 악귀처럼 변해서 죽인거야. 그러니 이게 얼마나 끔찍해.
거기 혼자 남은 삼촌이 있잖아. 나는 회개하는 기독교인으로, 그러면서 조선노동당원으로 여기(황해도)에 남아 있다는 그 삼촌. 삼촌이 뭐라 그래요. '그 때는 우리가 어렸어. 사람 사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그 때는 우리가 몰랐다. 사람 일이라는 것이 굉장히 복잡하고 여러가지가 얽히고 섥혀 있는 건데 우리가 무시하고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 사는 데는 오랫동안 나눴던 정이라든가 덕목이라든가 습관이라든가 이런 게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이 국가라는 이름 앞에서 다 무시당했다는 것, 그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Q. 제목 <손님>은 어떤 의미인가?
손님이 무속 용어로 '천연두'를 의미합니다. 천연두가 유행할 때는 왕자까지 걸려서 죽거나 곰보가 되거나 이랬으니까. 그러니까 풍토병이 돼서 계속 내려왔단 말이죠. 굿으로 남아 있어요. 손님 굿의 형태가. 그래서 거기서 착안해서 공산주의와 기독교를 '손님'으로 규정하면서 우리가 원래 조선 사람들끼리 서로 담 너머 장 나눠 먹고 살던 그것을 상실시키고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 단기간에 들어온 생각들, 굳어진 생각들, 관념, 이런 것들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만들면서 '손님'이라 규정하면서 황해도 지노귀굿의 열두 마당 형식에 맞춘 거예요.
Q. 소설에 '굿'의 형식을 차용한 이유는?
근대라는 것은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에요. 근대는 왜곡된 시간이에요. 왜곡되지 않은 근대가 없어 전세계가 다. 근대는 왜곡되고, 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나중에 추스르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그러면서 그것을 메꾸어 나가는 과정이야. 그러니까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에요. 신천 학살의 경우, 또는 광주 학살, 또는 4.3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야. 한쪽에서는 '잊어버려라 잊어버려라' 그러고. 한쪽에서는 '기억해야된다 기억해야된다' 이러는 거야. 우리 무속은 끝까지, 기억의 끝까지 가려는 거야. 기억하라는 거지. 가서 죽은 놈까지도 불러내.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거야. '내가 쟤 영혼이 실렸는데 어떻게 된거냐? 니가 쟤 때렸다며. 아픔을 줬다며.' 이러면서 기억의 끝까지 가. 그래서 그것을 지금 이 마당, 이 굿하는 마당에 불러내서 양자를 갖다 놓고 진실을 거기서 이야기 해요. 이야기 하면 다 울지. 울기도 하고 땅도 치고 이러다가 해원(解冤)을 한단 말이에요. 해원을 하게되는 과정이 굿이란 말이에요. 해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사실, 진실을 서로 소통을 통해서 밝히고, 그리고 이쪽이 참회를 해. '그건 내가 잘못했네' '형님 내가 잘못했수다' 이렇게 나와. 그러면 이쪽이 용서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해원이 되는 거야. 해원은 뭐에요. 원을 푼다는 거 아녜요. 풀어. 맺힌 것, 매듭을 풀어요. 해원 다음에는 뭐야. 상생(相生)이란 말예요. 같이 사는 거예요. 그렇게 안하면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이 지속될 수가 없어. 그래서 우리가 근대를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은 딱 그거에요. 해원, 상생이야. 그래서 신천 학살을 통해 근대가 가진, 근대가 왜곡됐다는 것, 그것을 풀어야 된다는 것, 그것을 넘어서야 된다는 것, 그것을 넘어서야 된다는 의미에서의 해원, 상생을 해야된다 그래서 신천 대학살을 빌려온 거예요.
Q. <손님>에서 다양한 '시점'을 내세운 이유는?
작가의 전지적 시점이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고. <철도원 삼대>에서도 봤겠지만 종래 리얼리즘의 룰을 신통치 않게 생각해요. 전지적 시점이 어딨어. 관점은 등장인물이나 캐릭터에 따라서 여러 다중적 관점이 있는 거죠. 거기에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서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잖아 서로. 그러나 전체 큰 흐름은 알 수 있잖아요. 입장을 다르게 이야기 하면서 밝혀지잖아요. 그런 서술방식을 취한 거죠.
이재복/문학평론가·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6.25라고 하는 전쟁이 굉장히 불가해적인 측면들이 있잖아요.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해의 문제죠. 그런데 그 화해는 거의 불가능해요. 그 불가능하다는 것을 4.3 사건, 여순사건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6.25는 더 하겠죠. 작가들이 그런 부담 때문에 화해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기 어려운 거예요. 그런 점에서 황석영 선생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작가가 칼을 빼든 거죠. 화해의 문제를 한 번 다뤄보자. 여기에 환상, 헛것, 굿, 이런 것들을 끌어들여서 환상과 실제, 현실과 헛것, 이런 것들을 같이 이야기 해준 거죠. 그런 점들이 사실 황석영이기 때문에 손님이란 작품을 쓸 수 있었지 다른 작가들은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저는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Q. <손님> 집필 후유증은 없었나?
너무 끔찍한 이야기를 써서, 다 쓰고 나서는 한 몇 달 쉬어야 되겠더라고. 정말 그런 작품은 이제 다시는 안 쓸 것 같아. 참 끔찍했어요. 쓰면서도.
Q. 본인의 어떤 작품을 좋아하나?
작가는 평론가하고 생각이 좀 다른 것이. <손님>보다는 <오래된 정원>이 나는 쓸 때 더 감성적으로 좋았고. <손님>은 힘들고 지겨웠고. 다 일장일단이 있는데. 사실 쓸 때 좀 즐거운 것이 좋겠어. 최근에 쓴 <철도원 삼대>를 쓸 때는 정말 즐겁게 썼어요. 이야깃거리, '이렇게 이야기하면 재미있겠구나' 이렇게. 누구한테 재미있는 이야기 해주듯이.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런 자세로 글을 썼으면 좋겠어. 만년문학이라 그러는데, 한 10년 더 쓸 생각인데 건강이 허락하면. 이제는 좀 즐겁게 썼으면 좋겠어요. 끔찍한 건 이제 못쓰겠어.
Q.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내가 앞으로 3권에서 4권 정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운이 있으면. 한 90살까지는 써야지. 그러면 이걸 뭐라고 생각할까. 명실공히 만년문학인데 이걸 뭐라고 생각할까 그러다가 내가 역사로부터 민초들의 일상을 복원해내야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민초들의 일상을 복원해내자, 그런 소설을 써야겠다, 그런 일상을 복원해내는데 역사에서 바로 오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했고. 중간지점을 보니까 민담이란 영역이 있어요. 민초들이 자기 일상을 회상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또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부풀려서 하기도 하고, 아주 재미있는, 입담이 좋은 사람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로 만들어서 이야기도 하고. 역사로 넘어가기 전에 민초들의 이야기, 민담이라는 그런 양식이 있구나. 그러면 내 소설을 '민담 리얼리즘'이다 하고 스스로 이름을 짓는 건 어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철도원 삼대> 이후로 쓰는 작품들은 아마 '민담 리얼리즘'으로 분류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죠.
Q.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나.
동아시아의 광대, 이런 이야기꾼 있잖아. 떠돌이 이야기꾼 같은 거. 그런 것을 스스로 생각하는데 이야기꾼으로 인생을 마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Q. <손님>의 집필 과정은?
1993년에 귀국을 해서 들어오자마자 구속돼서 5년 동안 징역을 살았잖아요. 그 사이에 그 안에서 집필권을 줬으면 진작 썼을텐데 집필권을 안줬으니까. 그래서 1998년에 석방이 됐고, 그리고 나오자마자 이것을 쓰려고 자료도 펼쳐보고 노트도 하고 시작을 했는데 안되더라고. 작가로 돌아올 준비가 안됐던 것 같아요. 한 15년 공백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주변에서는 농담 삼아서 '황석영이 이제 끝났다, 못돌아온다.' 15년 동안 아무것도 안했으니까. <오래된 정원>을 다 쓰고 나니까, 출판하고 나니까 좀 준비가 되더라고 심리적으로. 그래서 쓰기 시작했는데, 마침 2000년이면 한국전쟁 50주년이에요. 이게 맞아떨어졌어요. 그래서 그 무렵에 발표하게 된 거죠.
Q.왜 '황해도 신천 학살'에 주목했나?
그 사실 자체로도 굉장히 압도적이에요. 당시 6만여명의 군민이 있었는데 절반인 3만여명이 학살을 당했단 말이죠.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아마 제주 4.3을 빼놓고는, 그래도 제주는 제법 넓은 지역이잖아요. 일개 농촌 군이라는 곳에서 절반 정도의 인구가 학살됐다는 것이 굉장히 충격적인데. 거기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가 (신천을) 방문하고 나와서 우연히 신천 학살에 대해서 물어보면, 다 의견이 엇갈리는데, 일본에서 정경모 선생이 자기가 갖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미군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그랬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거죠. 굉장히 거기에 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게 우리끼리 한 짓이로구나.
Q. 1989년 방북 당시 황해도 신천군도 방문했는데...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원적이 명시돼 있어요. 지금은 호적제도가 없어졌지만 원적지에 뭐라고 돼 있냐면 황해도 신천군 온정면 온천리 103번지야. 그러니까 아버지의 고향이 신천인 셈이에요. 신천 근방에 250년된 황 씨 집성촌이 있어요. 거기 어디였겠지. 감회는 별로 없고 그러나 내면에서 '아 우리 조성이 몇 대에 걸쳐서 오랫동안 살던 곳이다' 이런 느낌은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향수라든가 이산의 아픔이라든가 이런 게 들어간 것이 아니고, 나는 신천 학살이란 팩트 자체를 놓고 동아시아의 근대를 탐구했다 그럴까. 그런 면이 있는 거예요.
Q. <손님>은 '신천 학살'을 충실히 묘사했나?
거기에 묘사된 내용이나 증언이나 이런 것들은 (사실보다) 많이 축소한 거예요. 사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많았는데. 6만이 살면 저게 뉘 집 딸인지 뉘 집 아들인지 서로 다 알아요. 그런 사람들, 담 너머로 서로 장 나눠먹고 서로 지나가다 들밥 먹으라 그러면 같이 어울려서 밥 먹고, 경조사가 되면 같이 가서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50일의 짧은 기간에 서로 악귀처럼 변해서 죽인거야. 그러니 이게 얼마나 끔찍해.
거기 혼자 남은 삼촌이 있잖아. 나는 회개하는 기독교인으로, 그러면서 조선노동당원으로 여기(황해도)에 남아 있다는 그 삼촌. 삼촌이 뭐라 그래요. '그 때는 우리가 어렸어. 사람 사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그 때는 우리가 몰랐다. 사람 일이라는 것이 굉장히 복잡하고 여러가지가 얽히고 섥혀 있는 건데 우리가 무시하고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 사는 데는 오랫동안 나눴던 정이라든가 덕목이라든가 습관이라든가 이런 게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이 국가라는 이름 앞에서 다 무시당했다는 것, 그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Q. 제목 <손님>은 어떤 의미인가?
손님이 무속 용어로 '천연두'를 의미합니다. 천연두가 유행할 때는 왕자까지 걸려서 죽거나 곰보가 되거나 이랬으니까. 그러니까 풍토병이 돼서 계속 내려왔단 말이죠. 굿으로 남아 있어요. 손님 굿의 형태가. 그래서 거기서 착안해서 공산주의와 기독교를 '손님'으로 규정하면서 우리가 원래 조선 사람들끼리 서로 담 너머 장 나눠 먹고 살던 그것을 상실시키고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 단기간에 들어온 생각들, 굳어진 생각들, 관념, 이런 것들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만들면서 '손님'이라 규정하면서 황해도 지노귀굿의 열두 마당 형식에 맞춘 거예요.
Q. 소설에 '굿'의 형식을 차용한 이유는?
근대라는 것은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에요. 근대는 왜곡된 시간이에요. 왜곡되지 않은 근대가 없어 전세계가 다. 근대는 왜곡되고, 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나중에 추스르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그러면서 그것을 메꾸어 나가는 과정이야. 그러니까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에요. 신천 학살의 경우, 또는 광주 학살, 또는 4.3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야. 한쪽에서는 '잊어버려라 잊어버려라' 그러고. 한쪽에서는 '기억해야된다 기억해야된다' 이러는 거야. 우리 무속은 끝까지, 기억의 끝까지 가려는 거야. 기억하라는 거지. 가서 죽은 놈까지도 불러내.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거야. '내가 쟤 영혼이 실렸는데 어떻게 된거냐? 니가 쟤 때렸다며. 아픔을 줬다며.' 이러면서 기억의 끝까지 가. 그래서 그것을 지금 이 마당, 이 굿하는 마당에 불러내서 양자를 갖다 놓고 진실을 거기서 이야기 해요. 이야기 하면 다 울지. 울기도 하고 땅도 치고 이러다가 해원(解冤)을 한단 말이에요. 해원을 하게되는 과정이 굿이란 말이에요. 해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사실, 진실을 서로 소통을 통해서 밝히고, 그리고 이쪽이 참회를 해. '그건 내가 잘못했네' '형님 내가 잘못했수다' 이렇게 나와. 그러면 이쪽이 용서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해원이 되는 거야. 해원은 뭐에요. 원을 푼다는 거 아녜요. 풀어. 맺힌 것, 매듭을 풀어요. 해원 다음에는 뭐야. 상생(相生)이란 말예요. 같이 사는 거예요. 그렇게 안하면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이 지속될 수가 없어. 그래서 우리가 근대를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은 딱 그거에요. 해원, 상생이야. 그래서 신천 학살을 통해 근대가 가진, 근대가 왜곡됐다는 것, 그것을 풀어야 된다는 것, 그것을 넘어서야 된다는 것, 그것을 넘어서야 된다는 의미에서의 해원, 상생을 해야된다 그래서 신천 대학살을 빌려온 거예요.
Q. <손님>에서 다양한 '시점'을 내세운 이유는?
작가의 전지적 시점이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고. <철도원 삼대>에서도 봤겠지만 종래 리얼리즘의 룰을 신통치 않게 생각해요. 전지적 시점이 어딨어. 관점은 등장인물이나 캐릭터에 따라서 여러 다중적 관점이 있는 거죠. 거기에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서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잖아 서로. 그러나 전체 큰 흐름은 알 수 있잖아요. 입장을 다르게 이야기 하면서 밝혀지잖아요. 그런 서술방식을 취한 거죠.
이재복/문학평론가·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6.25라고 하는 전쟁이 굉장히 불가해적인 측면들이 있잖아요.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해의 문제죠. 그런데 그 화해는 거의 불가능해요. 그 불가능하다는 것을 4.3 사건, 여순사건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6.25는 더 하겠죠. 작가들이 그런 부담 때문에 화해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기 어려운 거예요. 그런 점에서 황석영 선생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작가가 칼을 빼든 거죠. 화해의 문제를 한 번 다뤄보자. 여기에 환상, 헛것, 굿, 이런 것들을 끌어들여서 환상과 실제, 현실과 헛것, 이런 것들을 같이 이야기 해준 거죠. 그런 점들이 사실 황석영이기 때문에 손님이란 작품을 쓸 수 있었지 다른 작가들은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저는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Q. <손님> 집필 후유증은 없었나?
너무 끔찍한 이야기를 써서, 다 쓰고 나서는 한 몇 달 쉬어야 되겠더라고. 정말 그런 작품은 이제 다시는 안 쓸 것 같아. 참 끔찍했어요. 쓰면서도.
Q. 본인의 어떤 작품을 좋아하나?
작가는 평론가하고 생각이 좀 다른 것이. <손님>보다는 <오래된 정원>이 나는 쓸 때 더 감성적으로 좋았고. <손님>은 힘들고 지겨웠고. 다 일장일단이 있는데. 사실 쓸 때 좀 즐거운 것이 좋겠어. 최근에 쓴 <철도원 삼대>를 쓸 때는 정말 즐겁게 썼어요. 이야깃거리, '이렇게 이야기하면 재미있겠구나' 이렇게. 누구한테 재미있는 이야기 해주듯이.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런 자세로 글을 썼으면 좋겠어. 만년문학이라 그러는데, 한 10년 더 쓸 생각인데 건강이 허락하면. 이제는 좀 즐겁게 썼으면 좋겠어요. 끔찍한 건 이제 못쓰겠어.
Q.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내가 앞으로 3권에서 4권 정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운이 있으면. 한 90살까지는 써야지. 그러면 이걸 뭐라고 생각할까. 명실공히 만년문학인데 이걸 뭐라고 생각할까 그러다가 내가 역사로부터 민초들의 일상을 복원해내야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민초들의 일상을 복원해내자, 그런 소설을 써야겠다, 그런 일상을 복원해내는데 역사에서 바로 오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했고. 중간지점을 보니까 민담이란 영역이 있어요. 민초들이 자기 일상을 회상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또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부풀려서 하기도 하고, 아주 재미있는, 입담이 좋은 사람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로 만들어서 이야기도 하고. 역사로 넘어가기 전에 민초들의 이야기, 민담이라는 그런 양식이 있구나. 그러면 내 소설을 '민담 리얼리즘'이다 하고 스스로 이름을 짓는 건 어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철도원 삼대> 이후로 쓰는 작품들은 아마 '민담 리얼리즘'으로 분류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죠.
Q.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나.
동아시아의 광대, 이런 이야기꾼 있잖아. 떠돌이 이야기꾼 같은 거. 그런 것을 스스로 생각하는데 이야기꾼으로 인생을 마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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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시대의 이야기꾼 황석영 “내 장르는 민담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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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08-22 21:30:17
- 수정2021-08-22 21:35:25
황석영/소설가
Q. <손님>의 집필 과정은?
1993년에 귀국을 해서 들어오자마자 구속돼서 5년 동안 징역을 살았잖아요. 그 사이에 그 안에서 집필권을 줬으면 진작 썼을텐데 집필권을 안줬으니까. 그래서 1998년에 석방이 됐고, 그리고 나오자마자 이것을 쓰려고 자료도 펼쳐보고 노트도 하고 시작을 했는데 안되더라고. 작가로 돌아올 준비가 안됐던 것 같아요. 한 15년 공백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주변에서는 농담 삼아서 '황석영이 이제 끝났다, 못돌아온다.' 15년 동안 아무것도 안했으니까. <오래된 정원>을 다 쓰고 나니까, 출판하고 나니까 좀 준비가 되더라고 심리적으로. 그래서 쓰기 시작했는데, 마침 2000년이면 한국전쟁 50주년이에요. 이게 맞아떨어졌어요. 그래서 그 무렵에 발표하게 된 거죠.
Q.왜 '황해도 신천 학살'에 주목했나?
그 사실 자체로도 굉장히 압도적이에요. 당시 6만여명의 군민이 있었는데 절반인 3만여명이 학살을 당했단 말이죠.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아마 제주 4.3을 빼놓고는, 그래도 제주는 제법 넓은 지역이잖아요. 일개 농촌 군이라는 곳에서 절반 정도의 인구가 학살됐다는 것이 굉장히 충격적인데. 거기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가 (신천을) 방문하고 나와서 우연히 신천 학살에 대해서 물어보면, 다 의견이 엇갈리는데, 일본에서 정경모 선생이 자기가 갖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미군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그랬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거죠. 굉장히 거기에 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게 우리끼리 한 짓이로구나.
Q. 1989년 방북 당시 황해도 신천군도 방문했는데...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원적이 명시돼 있어요. 지금은 호적제도가 없어졌지만 원적지에 뭐라고 돼 있냐면 황해도 신천군 온정면 온천리 103번지야. 그러니까 아버지의 고향이 신천인 셈이에요. 신천 근방에 250년된 황 씨 집성촌이 있어요. 거기 어디였겠지. 감회는 별로 없고 그러나 내면에서 '아 우리 조성이 몇 대에 걸쳐서 오랫동안 살던 곳이다' 이런 느낌은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향수라든가 이산의 아픔이라든가 이런 게 들어간 것이 아니고, 나는 신천 학살이란 팩트 자체를 놓고 동아시아의 근대를 탐구했다 그럴까. 그런 면이 있는 거예요.
Q. <손님>은 '신천 학살'을 충실히 묘사했나?
거기에 묘사된 내용이나 증언이나 이런 것들은 (사실보다) 많이 축소한 거예요. 사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많았는데. 6만이 살면 저게 뉘 집 딸인지 뉘 집 아들인지 서로 다 알아요. 그런 사람들, 담 너머로 서로 장 나눠먹고 서로 지나가다 들밥 먹으라 그러면 같이 어울려서 밥 먹고, 경조사가 되면 같이 가서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50일의 짧은 기간에 서로 악귀처럼 변해서 죽인거야. 그러니 이게 얼마나 끔찍해.
거기 혼자 남은 삼촌이 있잖아. 나는 회개하는 기독교인으로, 그러면서 조선노동당원으로 여기(황해도)에 남아 있다는 그 삼촌. 삼촌이 뭐라 그래요. '그 때는 우리가 어렸어. 사람 사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그 때는 우리가 몰랐다. 사람 일이라는 것이 굉장히 복잡하고 여러가지가 얽히고 섥혀 있는 건데 우리가 무시하고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 사는 데는 오랫동안 나눴던 정이라든가 덕목이라든가 습관이라든가 이런 게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이 국가라는 이름 앞에서 다 무시당했다는 것, 그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Q. 제목 <손님>은 어떤 의미인가?
손님이 무속 용어로 '천연두'를 의미합니다. 천연두가 유행할 때는 왕자까지 걸려서 죽거나 곰보가 되거나 이랬으니까. 그러니까 풍토병이 돼서 계속 내려왔단 말이죠. 굿으로 남아 있어요. 손님 굿의 형태가. 그래서 거기서 착안해서 공산주의와 기독교를 '손님'으로 규정하면서 우리가 원래 조선 사람들끼리 서로 담 너머 장 나눠 먹고 살던 그것을 상실시키고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 단기간에 들어온 생각들, 굳어진 생각들, 관념, 이런 것들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만들면서 '손님'이라 규정하면서 황해도 지노귀굿의 열두 마당 형식에 맞춘 거예요.
Q. 소설에 '굿'의 형식을 차용한 이유는?
근대라는 것은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에요. 근대는 왜곡된 시간이에요. 왜곡되지 않은 근대가 없어 전세계가 다. 근대는 왜곡되고, 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나중에 추스르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그러면서 그것을 메꾸어 나가는 과정이야. 그러니까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에요. 신천 학살의 경우, 또는 광주 학살, 또는 4.3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야. 한쪽에서는 '잊어버려라 잊어버려라' 그러고. 한쪽에서는 '기억해야된다 기억해야된다' 이러는 거야. 우리 무속은 끝까지, 기억의 끝까지 가려는 거야. 기억하라는 거지. 가서 죽은 놈까지도 불러내.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거야. '내가 쟤 영혼이 실렸는데 어떻게 된거냐? 니가 쟤 때렸다며. 아픔을 줬다며.' 이러면서 기억의 끝까지 가. 그래서 그것을 지금 이 마당, 이 굿하는 마당에 불러내서 양자를 갖다 놓고 진실을 거기서 이야기 해요. 이야기 하면 다 울지. 울기도 하고 땅도 치고 이러다가 해원(解冤)을 한단 말이에요. 해원을 하게되는 과정이 굿이란 말이에요. 해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사실, 진실을 서로 소통을 통해서 밝히고, 그리고 이쪽이 참회를 해. '그건 내가 잘못했네' '형님 내가 잘못했수다' 이렇게 나와. 그러면 이쪽이 용서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해원이 되는 거야. 해원은 뭐에요. 원을 푼다는 거 아녜요. 풀어. 맺힌 것, 매듭을 풀어요. 해원 다음에는 뭐야. 상생(相生)이란 말예요. 같이 사는 거예요. 그렇게 안하면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이 지속될 수가 없어. 그래서 우리가 근대를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은 딱 그거에요. 해원, 상생이야. 그래서 신천 학살을 통해 근대가 가진, 근대가 왜곡됐다는 것, 그것을 풀어야 된다는 것, 그것을 넘어서야 된다는 것, 그것을 넘어서야 된다는 의미에서의 해원, 상생을 해야된다 그래서 신천 대학살을 빌려온 거예요.
Q. <손님>에서 다양한 '시점'을 내세운 이유는?
작가의 전지적 시점이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고. <철도원 삼대>에서도 봤겠지만 종래 리얼리즘의 룰을 신통치 않게 생각해요. 전지적 시점이 어딨어. 관점은 등장인물이나 캐릭터에 따라서 여러 다중적 관점이 있는 거죠. 거기에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서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잖아 서로. 그러나 전체 큰 흐름은 알 수 있잖아요. 입장을 다르게 이야기 하면서 밝혀지잖아요. 그런 서술방식을 취한 거죠.
이재복/문학평론가·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6.25라고 하는 전쟁이 굉장히 불가해적인 측면들이 있잖아요.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해의 문제죠. 그런데 그 화해는 거의 불가능해요. 그 불가능하다는 것을 4.3 사건, 여순사건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6.25는 더 하겠죠. 작가들이 그런 부담 때문에 화해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기 어려운 거예요. 그런 점에서 황석영 선생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작가가 칼을 빼든 거죠. 화해의 문제를 한 번 다뤄보자. 여기에 환상, 헛것, 굿, 이런 것들을 끌어들여서 환상과 실제, 현실과 헛것, 이런 것들을 같이 이야기 해준 거죠. 그런 점들이 사실 황석영이기 때문에 손님이란 작품을 쓸 수 있었지 다른 작가들은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저는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Q. <손님> 집필 후유증은 없었나?
너무 끔찍한 이야기를 써서, 다 쓰고 나서는 한 몇 달 쉬어야 되겠더라고. 정말 그런 작품은 이제 다시는 안 쓸 것 같아. 참 끔찍했어요. 쓰면서도.
Q. 본인의 어떤 작품을 좋아하나?
작가는 평론가하고 생각이 좀 다른 것이. <손님>보다는 <오래된 정원>이 나는 쓸 때 더 감성적으로 좋았고. <손님>은 힘들고 지겨웠고. 다 일장일단이 있는데. 사실 쓸 때 좀 즐거운 것이 좋겠어. 최근에 쓴 <철도원 삼대>를 쓸 때는 정말 즐겁게 썼어요. 이야깃거리, '이렇게 이야기하면 재미있겠구나' 이렇게. 누구한테 재미있는 이야기 해주듯이.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런 자세로 글을 썼으면 좋겠어. 만년문학이라 그러는데, 한 10년 더 쓸 생각인데 건강이 허락하면. 이제는 좀 즐겁게 썼으면 좋겠어요. 끔찍한 건 이제 못쓰겠어.
Q.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내가 앞으로 3권에서 4권 정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운이 있으면. 한 90살까지는 써야지. 그러면 이걸 뭐라고 생각할까. 명실공히 만년문학인데 이걸 뭐라고 생각할까 그러다가 내가 역사로부터 민초들의 일상을 복원해내야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민초들의 일상을 복원해내자, 그런 소설을 써야겠다, 그런 일상을 복원해내는데 역사에서 바로 오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했고. 중간지점을 보니까 민담이란 영역이 있어요. 민초들이 자기 일상을 회상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또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부풀려서 하기도 하고, 아주 재미있는, 입담이 좋은 사람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로 만들어서 이야기도 하고. 역사로 넘어가기 전에 민초들의 이야기, 민담이라는 그런 양식이 있구나. 그러면 내 소설을 '민담 리얼리즘'이다 하고 스스로 이름을 짓는 건 어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철도원 삼대> 이후로 쓰는 작품들은 아마 '민담 리얼리즘'으로 분류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죠.
Q.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나.
동아시아의 광대, 이런 이야기꾼 있잖아. 떠돌이 이야기꾼 같은 거. 그런 것을 스스로 생각하는데 이야기꾼으로 인생을 마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Q. <손님>의 집필 과정은?
1993년에 귀국을 해서 들어오자마자 구속돼서 5년 동안 징역을 살았잖아요. 그 사이에 그 안에서 집필권을 줬으면 진작 썼을텐데 집필권을 안줬으니까. 그래서 1998년에 석방이 됐고, 그리고 나오자마자 이것을 쓰려고 자료도 펼쳐보고 노트도 하고 시작을 했는데 안되더라고. 작가로 돌아올 준비가 안됐던 것 같아요. 한 15년 공백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주변에서는 농담 삼아서 '황석영이 이제 끝났다, 못돌아온다.' 15년 동안 아무것도 안했으니까. <오래된 정원>을 다 쓰고 나니까, 출판하고 나니까 좀 준비가 되더라고 심리적으로. 그래서 쓰기 시작했는데, 마침 2000년이면 한국전쟁 50주년이에요. 이게 맞아떨어졌어요. 그래서 그 무렵에 발표하게 된 거죠.
Q.왜 '황해도 신천 학살'에 주목했나?
그 사실 자체로도 굉장히 압도적이에요. 당시 6만여명의 군민이 있었는데 절반인 3만여명이 학살을 당했단 말이죠.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아마 제주 4.3을 빼놓고는, 그래도 제주는 제법 넓은 지역이잖아요. 일개 농촌 군이라는 곳에서 절반 정도의 인구가 학살됐다는 것이 굉장히 충격적인데. 거기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가 (신천을) 방문하고 나와서 우연히 신천 학살에 대해서 물어보면, 다 의견이 엇갈리는데, 일본에서 정경모 선생이 자기가 갖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미군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그랬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거죠. 굉장히 거기에 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게 우리끼리 한 짓이로구나.
Q. 1989년 방북 당시 황해도 신천군도 방문했는데...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원적이 명시돼 있어요. 지금은 호적제도가 없어졌지만 원적지에 뭐라고 돼 있냐면 황해도 신천군 온정면 온천리 103번지야. 그러니까 아버지의 고향이 신천인 셈이에요. 신천 근방에 250년된 황 씨 집성촌이 있어요. 거기 어디였겠지. 감회는 별로 없고 그러나 내면에서 '아 우리 조성이 몇 대에 걸쳐서 오랫동안 살던 곳이다' 이런 느낌은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향수라든가 이산의 아픔이라든가 이런 게 들어간 것이 아니고, 나는 신천 학살이란 팩트 자체를 놓고 동아시아의 근대를 탐구했다 그럴까. 그런 면이 있는 거예요.
Q. <손님>은 '신천 학살'을 충실히 묘사했나?
거기에 묘사된 내용이나 증언이나 이런 것들은 (사실보다) 많이 축소한 거예요. 사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많았는데. 6만이 살면 저게 뉘 집 딸인지 뉘 집 아들인지 서로 다 알아요. 그런 사람들, 담 너머로 서로 장 나눠먹고 서로 지나가다 들밥 먹으라 그러면 같이 어울려서 밥 먹고, 경조사가 되면 같이 가서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50일의 짧은 기간에 서로 악귀처럼 변해서 죽인거야. 그러니 이게 얼마나 끔찍해.
거기 혼자 남은 삼촌이 있잖아. 나는 회개하는 기독교인으로, 그러면서 조선노동당원으로 여기(황해도)에 남아 있다는 그 삼촌. 삼촌이 뭐라 그래요. '그 때는 우리가 어렸어. 사람 사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그 때는 우리가 몰랐다. 사람 일이라는 것이 굉장히 복잡하고 여러가지가 얽히고 섥혀 있는 건데 우리가 무시하고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 사는 데는 오랫동안 나눴던 정이라든가 덕목이라든가 습관이라든가 이런 게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이 국가라는 이름 앞에서 다 무시당했다는 것, 그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Q. 제목 <손님>은 어떤 의미인가?
손님이 무속 용어로 '천연두'를 의미합니다. 천연두가 유행할 때는 왕자까지 걸려서 죽거나 곰보가 되거나 이랬으니까. 그러니까 풍토병이 돼서 계속 내려왔단 말이죠. 굿으로 남아 있어요. 손님 굿의 형태가. 그래서 거기서 착안해서 공산주의와 기독교를 '손님'으로 규정하면서 우리가 원래 조선 사람들끼리 서로 담 너머 장 나눠 먹고 살던 그것을 상실시키고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 단기간에 들어온 생각들, 굳어진 생각들, 관념, 이런 것들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만들면서 '손님'이라 규정하면서 황해도 지노귀굿의 열두 마당 형식에 맞춘 거예요.
Q. 소설에 '굿'의 형식을 차용한 이유는?
근대라는 것은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에요. 근대는 왜곡된 시간이에요. 왜곡되지 않은 근대가 없어 전세계가 다. 근대는 왜곡되고, 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나중에 추스르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그러면서 그것을 메꾸어 나가는 과정이야. 그러니까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에요. 신천 학살의 경우, 또는 광주 학살, 또는 4.3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야. 한쪽에서는 '잊어버려라 잊어버려라' 그러고. 한쪽에서는 '기억해야된다 기억해야된다' 이러는 거야. 우리 무속은 끝까지, 기억의 끝까지 가려는 거야. 기억하라는 거지. 가서 죽은 놈까지도 불러내.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거야. '내가 쟤 영혼이 실렸는데 어떻게 된거냐? 니가 쟤 때렸다며. 아픔을 줬다며.' 이러면서 기억의 끝까지 가. 그래서 그것을 지금 이 마당, 이 굿하는 마당에 불러내서 양자를 갖다 놓고 진실을 거기서 이야기 해요. 이야기 하면 다 울지. 울기도 하고 땅도 치고 이러다가 해원(解冤)을 한단 말이에요. 해원을 하게되는 과정이 굿이란 말이에요. 해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사실, 진실을 서로 소통을 통해서 밝히고, 그리고 이쪽이 참회를 해. '그건 내가 잘못했네' '형님 내가 잘못했수다' 이렇게 나와. 그러면 이쪽이 용서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해원이 되는 거야. 해원은 뭐에요. 원을 푼다는 거 아녜요. 풀어. 맺힌 것, 매듭을 풀어요. 해원 다음에는 뭐야. 상생(相生)이란 말예요. 같이 사는 거예요. 그렇게 안하면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이 지속될 수가 없어. 그래서 우리가 근대를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은 딱 그거에요. 해원, 상생이야. 그래서 신천 학살을 통해 근대가 가진, 근대가 왜곡됐다는 것, 그것을 풀어야 된다는 것, 그것을 넘어서야 된다는 것, 그것을 넘어서야 된다는 의미에서의 해원, 상생을 해야된다 그래서 신천 대학살을 빌려온 거예요.
Q. <손님>에서 다양한 '시점'을 내세운 이유는?
작가의 전지적 시점이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고. <철도원 삼대>에서도 봤겠지만 종래 리얼리즘의 룰을 신통치 않게 생각해요. 전지적 시점이 어딨어. 관점은 등장인물이나 캐릭터에 따라서 여러 다중적 관점이 있는 거죠. 거기에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서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잖아 서로. 그러나 전체 큰 흐름은 알 수 있잖아요. 입장을 다르게 이야기 하면서 밝혀지잖아요. 그런 서술방식을 취한 거죠.
이재복/문학평론가·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6.25라고 하는 전쟁이 굉장히 불가해적인 측면들이 있잖아요.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해의 문제죠. 그런데 그 화해는 거의 불가능해요. 그 불가능하다는 것을 4.3 사건, 여순사건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6.25는 더 하겠죠. 작가들이 그런 부담 때문에 화해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기 어려운 거예요. 그런 점에서 황석영 선생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작가가 칼을 빼든 거죠. 화해의 문제를 한 번 다뤄보자. 여기에 환상, 헛것, 굿, 이런 것들을 끌어들여서 환상과 실제, 현실과 헛것, 이런 것들을 같이 이야기 해준 거죠. 그런 점들이 사실 황석영이기 때문에 손님이란 작품을 쓸 수 있었지 다른 작가들은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저는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Q. <손님> 집필 후유증은 없었나?
너무 끔찍한 이야기를 써서, 다 쓰고 나서는 한 몇 달 쉬어야 되겠더라고. 정말 그런 작품은 이제 다시는 안 쓸 것 같아. 참 끔찍했어요. 쓰면서도.
Q. 본인의 어떤 작품을 좋아하나?
작가는 평론가하고 생각이 좀 다른 것이. <손님>보다는 <오래된 정원>이 나는 쓸 때 더 감성적으로 좋았고. <손님>은 힘들고 지겨웠고. 다 일장일단이 있는데. 사실 쓸 때 좀 즐거운 것이 좋겠어. 최근에 쓴 <철도원 삼대>를 쓸 때는 정말 즐겁게 썼어요. 이야깃거리, '이렇게 이야기하면 재미있겠구나' 이렇게. 누구한테 재미있는 이야기 해주듯이.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런 자세로 글을 썼으면 좋겠어. 만년문학이라 그러는데, 한 10년 더 쓸 생각인데 건강이 허락하면. 이제는 좀 즐겁게 썼으면 좋겠어요. 끔찍한 건 이제 못쓰겠어.
Q.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내가 앞으로 3권에서 4권 정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운이 있으면. 한 90살까지는 써야지. 그러면 이걸 뭐라고 생각할까. 명실공히 만년문학인데 이걸 뭐라고 생각할까 그러다가 내가 역사로부터 민초들의 일상을 복원해내야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민초들의 일상을 복원해내자, 그런 소설을 써야겠다, 그런 일상을 복원해내는데 역사에서 바로 오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했고. 중간지점을 보니까 민담이란 영역이 있어요. 민초들이 자기 일상을 회상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또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부풀려서 하기도 하고, 아주 재미있는, 입담이 좋은 사람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로 만들어서 이야기도 하고. 역사로 넘어가기 전에 민초들의 이야기, 민담이라는 그런 양식이 있구나. 그러면 내 소설을 '민담 리얼리즘'이다 하고 스스로 이름을 짓는 건 어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철도원 삼대> 이후로 쓰는 작품들은 아마 '민담 리얼리즘'으로 분류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죠.
Q.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나.
동아시아의 광대, 이런 이야기꾼 있잖아. 떠돌이 이야기꾼 같은 거. 그런 것을 스스로 생각하는데 이야기꾼으로 인생을 마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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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욱 기자 donke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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