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폭력과 광기로 얼룩진 저주받은 걸작…백민석의 ‘헤이, 우리 소풍 간다’
입력 2021.12.19 (21:37)
수정 2021.12.26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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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의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는 가벼운 신세대문학이 지배하던 1990년대 문단의 한가운데 던져진 낯선 충격이었다. 백민석의 소설에는 광기, 욕설, 엽기, 폭력, 패륜, 살인 등이 아무렇지 않게 전시되고 있었고, 정상과 상식과 도덕의 경계가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다. 거기에선 죽은 자가 산 자의 영혼을 지배하고, 소음과 악몽과 광기 어린 망상이 현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있었다. 소설의 형식은 또 어떤가. 이해하기 힘든 이상하고 폭력적인 망상과 환각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서사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이야기는 알아보기 힘들게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이해 불가능의 미궁으로 독자들을 끌고 간다.
이 괴상한 소설의 대강은 이렇다. 주인공 K는 무차별한 폭력과 죽음의 망상에 시달리는 스물일곱 살의 극작가다. 그는 모든 것을 찢고 죽이고 파괴하는 폭력의 화신인 딱따구리의 환각에 시도 때도 없이 사로잡힌다. 딱따구리는 그의 영혼을 점령하고 일상의 평온을 파괴한다. 딱따구리의 환각에 사로잡힌 K는 결국 그 딱따구리가 탄생한 곳, 끔찍한 악몽과 폭력의 기원을 찾아 홀린 듯 길을 떠난다. 그 기원의 장소는 바로 멀리서 학살의 소문이 들려오던 1980~1981년 무허가 판자촌이다.
K는 그때 판자촌에서 폭력과 가난으로 물든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고아 친구들을 하나둘 불러 모은다. 그 친구들은 모두 만화영화 주인공의 이름을 하고 있다. 요술공주 새리, 일곱난쟁이, 뽀빠이, 집없는소년, 손오공 등이 바로 그들이다. K와 친구들은 망각 속에 묻혀 있던 어린 시절의 옛 장소들을 하나씩 찾아다니며 그토록 잊고 싶었던 과거를 소환한다. 거기엔 안 선생님의 지도로 ‘고아의 노래’를 함께 불렀던 그리운 추억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억은 폭력과 죽음으로 얼룩져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그들 어린 만화영화 주인공들의 대장이자 폭력의 화신인 박스바니와 얽힌 끔찍한 기억이다. 결국 그들이 이르게 되는 곳은 그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이 벌어졌던 “빌어먹을 일곱난쟁이들의 갱(坑)”이다. 그렇게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끔찍한 트라우마의 장소로 귀환하는 그들의 여행은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대강의 줄거리를 요약해봤지만, 사실 이 소설은 요약이 불가능한 소설이다.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다지 소득도 없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그런 식의 줄거리를 훌쩍 초과하는, 폭발할 듯한 광적인 정념과 에너지에 의해 작동하는 소설이기 때문이고, 서사를 찢어놓는 파편적인 환각의 이미지가 이야기를 압도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헤이, 우리 소풍 간다>는 이상한 소설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그간 우리가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소설의 관습과 계보를 훌쩍 넘어 허물어버린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극작가 K부터가 이상한 별종이다. 그는 역겹고 지겨운 세상을 권태와 무위(無爲)로 가까스로 견디고 있는 인간이고, 망상과 환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악몽의 한가운데로 몰아넣는 인간이다. 좀 더 나가보면, K는 소설의 화자-주인공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가 아니다.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다름 아닌 딱따구리다. 딱따구리란 무엇인가?
딱따구리는 K의 환각 속에서 파괴와 살육의 향연을 즐기는 괴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괴물의 정체는 소설의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암시된다. 이를테면, K의 어릴 적 고아친구인 새리는 말한다. “내가 새리였던 것처럼 (……) 너도 무언가 있었지?” “넌 아마도…… 딱따구리, 였지?” K가 답한다. “그래.” 그 시절 판자촌의 고아들은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누비는 만화영화 주인공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고아 친구들은 각각 요술공주 새리, 일곱난쟁이, 뽀빠이, 집없는소년, 손오공 같은 만화의 캐릭터에 자기의 정체성을 투사하고 위로받았다. K도 그러했고, 그때 K가 동일시한 것은 딱따구리였다. 그런데 만화 속의 ‘딱따구리’는 점점 현실의 폭력에 감염되고 흡수되어 어느 순간 K도 모르는 사이에 살육과 폭력을 향유하는 ‘ 딱따구리’로 변태했다. 폭력적인 살육과 파괴를 자행하는 딱따구리는 K의 영혼 속에 숨어들어가 점점 커지면서 결국은 K의 의식까지 삼켜버린다. 이때 딱따구리는, 단순한 이미지나 환각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실재한다.
얘야. 그건 반드시 텔레비전 브라운관 속의 장난꾸러기 새만은 아니란다…… 그건 가짜가 아니란다. 얘야, 그건, 실제 있는 실제 악몽의 또 다른 그림자란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중에서 |
딱따구리는 “이 세상 끝까지 쫓아다닐 어떤 악몽”이고, K의 의식을 삼켜버린 K 안의 K다. 즉 K의 진짜 주인은 K가 아니라 딱따구리인 셈이다. 딱따구리라고 불리는 그것은 주체가 결코 피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주체 안에 존재하는 어떤 파괴적인 힘이다. 그렇게 본다면, 딱따구리는 다름 아닌 (프로이트가 말했던) 죽음충동의 다른 이름이다. 그처럼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영혼을 부르는 이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분열증이다. 사실 <헤이, 우리 소풍 간다>의 서사가 시종 이해하기 힘든 요령부득의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산다는 것”은 조금씩 “미쳐들 가는 거”라는 새리의 말처럼, 이 소설의 화자는 그렇게 점점 미쳐가는 영혼이다. 즉 이 소설은 살육과 파괴로 치달아가는 (죽음)충동에 의해 삼켜진 미쳐가는 영혼이 서술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헤이, 우리 소풍 간다>의 서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파편화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며, 그래서 이 소설의 서사를 분열증의 서사라고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헤이, 우리 소풍 간다>는 1980년대의 현실을 암울하게 뒤덮고 있었던 폭력의 기운이 어떻게 오래도록 살아남아 영혼을 감염시키고 결국은 삼켜버리게 되는가를 파괴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점이 바로 K와 그 친구들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그려지는 만화영화 주인공들의 실체다. 1980년은 흑백 TV가 컬러 TV로 바뀌었던 때였다. 화려한 컬러의 색채를 입고 브라운관을 누비던 만화영화 주인공들은 어린 고아들의 동심이 투사되는 대상이자 고아들의 고단한 정체성을 의지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아 이미지였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딱따구리를 비롯한 그 만화영화 주인공들은 끔찍한 폭력의 화신으로 변한다. 그리고 결국은 고아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삼켜버린다. 이 소설의 충격효과는 동심의 상징인 만화영화를 파멸적인 악몽의 드라마로 그려내는 그같은 강렬한 콘트라스트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 점은 피하고 싶은 과거의 트라우마와 죽음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몰아가는 이 고아 친구들의 죽음의 여행을 동심과 기대로 가득한 ‘소풍’이라는 반어적인 단어로 묘사하는 소설의 제목에서도 또 한 번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모든 폭력과 광기의 드라마의 기원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엔 바로 1980년 광주의 학살이 있었다. K와 그 친구들의 악몽이 시작되었던 1980년과 1981년, 고아 친구들이 살던 무허가 판자촌에는 광주의 학살 소식이 유언비어처럼 떠돌고 있었고 폭력 철거가 자행되고 있었으며 또 주변의 이웃이 소리소문없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를 통해 이 소설은 저 모든 비극의 근원으로 광기와 폭력으로 일그러진 1980년의 시대적 분위기를 지목한다. 계급적 박탈감과 소외와 가난 속에 방치된 판자촌의 고아들, 전염병 같은 시대의 폭력과 광기에 저도 몰래 감염되고 그것을 내면화해 스스로를 끔찍한 폭력의 한가운데로 몰아가는 아이들, 어른이 되어서도 매 순간 귀환하는 죽음과 공포의 망령에 사로잡히는 그들, 그리고 그 과거의 망령을 불러들여 기어이 그 속에 자기를 내맡기고 분열증적 주체로 살아가는 화자-주인공 K. 백민석은 이들의 분열증적 자기 파멸의 드라마를 통해 끊임없이 현재로 되돌아와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1980년대 폭력의 기억을 유니크한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헤이, 우리 소풍간다>는 불운한 소설이다. 한국소설의 관습을 멀리 뛰어넘는 파격적인 형식과 난해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소설은 당대에 충분히 인정받지도 못했고 이해되지도 못했다. 그것은 이 소설이 ‘1990년대 문학’이라는 당대의 제한적인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훌쩍 초월하는 강렬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언어가 당대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이를테면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영찬 문학평론가·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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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 폭력과 광기로 얼룩진 저주받은 걸작…백민석의 ‘헤이, 우리 소풍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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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2021-12-26 07:26:53
백민석의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는 가벼운 신세대문학이 지배하던 1990년대 문단의 한가운데 던져진 낯선 충격이었다. 백민석의 소설에는 광기, 욕설, 엽기, 폭력, 패륜, 살인 등이 아무렇지 않게 전시되고 있었고, 정상과 상식과 도덕의 경계가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다. 거기에선 죽은 자가 산 자의 영혼을 지배하고, 소음과 악몽과 광기 어린 망상이 현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있었다. 소설의 형식은 또 어떤가. 이해하기 힘든 이상하고 폭력적인 망상과 환각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서사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이야기는 알아보기 힘들게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이해 불가능의 미궁으로 독자들을 끌고 간다.
이 괴상한 소설의 대강은 이렇다. 주인공 K는 무차별한 폭력과 죽음의 망상에 시달리는 스물일곱 살의 극작가다. 그는 모든 것을 찢고 죽이고 파괴하는 폭력의 화신인 딱따구리의 환각에 시도 때도 없이 사로잡힌다. 딱따구리는 그의 영혼을 점령하고 일상의 평온을 파괴한다. 딱따구리의 환각에 사로잡힌 K는 결국 그 딱따구리가 탄생한 곳, 끔찍한 악몽과 폭력의 기원을 찾아 홀린 듯 길을 떠난다. 그 기원의 장소는 바로 멀리서 학살의 소문이 들려오던 1980~1981년 무허가 판자촌이다.
K는 그때 판자촌에서 폭력과 가난으로 물든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고아 친구들을 하나둘 불러 모은다. 그 친구들은 모두 만화영화 주인공의 이름을 하고 있다. 요술공주 새리, 일곱난쟁이, 뽀빠이, 집없는소년, 손오공 등이 바로 그들이다. K와 친구들은 망각 속에 묻혀 있던 어린 시절의 옛 장소들을 하나씩 찾아다니며 그토록 잊고 싶었던 과거를 소환한다. 거기엔 안 선생님의 지도로 ‘고아의 노래’를 함께 불렀던 그리운 추억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억은 폭력과 죽음으로 얼룩져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그들 어린 만화영화 주인공들의 대장이자 폭력의 화신인 박스바니와 얽힌 끔찍한 기억이다. 결국 그들이 이르게 되는 곳은 그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이 벌어졌던 “빌어먹을 일곱난쟁이들의 갱(坑)”이다. 그렇게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끔찍한 트라우마의 장소로 귀환하는 그들의 여행은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대강의 줄거리를 요약해봤지만, 사실 이 소설은 요약이 불가능한 소설이다.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다지 소득도 없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그런 식의 줄거리를 훌쩍 초과하는, 폭발할 듯한 광적인 정념과 에너지에 의해 작동하는 소설이기 때문이고, 서사를 찢어놓는 파편적인 환각의 이미지가 이야기를 압도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헤이, 우리 소풍 간다>는 이상한 소설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그간 우리가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소설의 관습과 계보를 훌쩍 넘어 허물어버린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극작가 K부터가 이상한 별종이다. 그는 역겹고 지겨운 세상을 권태와 무위(無爲)로 가까스로 견디고 있는 인간이고, 망상과 환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악몽의 한가운데로 몰아넣는 인간이다. 좀 더 나가보면, K는 소설의 화자-주인공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가 아니다.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다름 아닌 딱따구리다. 딱따구리란 무엇인가?
딱따구리는 K의 환각 속에서 파괴와 살육의 향연을 즐기는 괴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괴물의 정체는 소설의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암시된다. 이를테면, K의 어릴 적 고아친구인 새리는 말한다. “내가 새리였던 것처럼 (……) 너도 무언가 있었지?” “넌 아마도…… 딱따구리, 였지?” K가 답한다. “그래.” 그 시절 판자촌의 고아들은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누비는 만화영화 주인공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고아 친구들은 각각 요술공주 새리, 일곱난쟁이, 뽀빠이, 집없는소년, 손오공 같은 만화의 캐릭터에 자기의 정체성을 투사하고 위로받았다. K도 그러했고, 그때 K가 동일시한 것은 딱따구리였다. 그런데 만화 속의 ‘딱따구리’는 점점 현실의 폭력에 감염되고 흡수되어 어느 순간 K도 모르는 사이에 살육과 폭력을 향유하는 ‘ 딱따구리’로 변태했다. 폭력적인 살육과 파괴를 자행하는 딱따구리는 K의 영혼 속에 숨어들어가 점점 커지면서 결국은 K의 의식까지 삼켜버린다. 이때 딱따구리는, 단순한 이미지나 환각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실재한다.
얘야. 그건 반드시 텔레비전 브라운관 속의 장난꾸러기 새만은 아니란다…… 그건 가짜가 아니란다. 얘야, 그건, 실제 있는 실제 악몽의 또 다른 그림자란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중에서 |
딱따구리는 “이 세상 끝까지 쫓아다닐 어떤 악몽”이고, K의 의식을 삼켜버린 K 안의 K다. 즉 K의 진짜 주인은 K가 아니라 딱따구리인 셈이다. 딱따구리라고 불리는 그것은 주체가 결코 피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주체 안에 존재하는 어떤 파괴적인 힘이다. 그렇게 본다면, 딱따구리는 다름 아닌 (프로이트가 말했던) 죽음충동의 다른 이름이다. 그처럼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영혼을 부르는 이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분열증이다. 사실 <헤이, 우리 소풍 간다>의 서사가 시종 이해하기 힘든 요령부득의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산다는 것”은 조금씩 “미쳐들 가는 거”라는 새리의 말처럼, 이 소설의 화자는 그렇게 점점 미쳐가는 영혼이다. 즉 이 소설은 살육과 파괴로 치달아가는 (죽음)충동에 의해 삼켜진 미쳐가는 영혼이 서술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헤이, 우리 소풍 간다>의 서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파편화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며, 그래서 이 소설의 서사를 분열증의 서사라고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헤이, 우리 소풍 간다>는 1980년대의 현실을 암울하게 뒤덮고 있었던 폭력의 기운이 어떻게 오래도록 살아남아 영혼을 감염시키고 결국은 삼켜버리게 되는가를 파괴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점이 바로 K와 그 친구들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그려지는 만화영화 주인공들의 실체다. 1980년은 흑백 TV가 컬러 TV로 바뀌었던 때였다. 화려한 컬러의 색채를 입고 브라운관을 누비던 만화영화 주인공들은 어린 고아들의 동심이 투사되는 대상이자 고아들의 고단한 정체성을 의지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아 이미지였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딱따구리를 비롯한 그 만화영화 주인공들은 끔찍한 폭력의 화신으로 변한다. 그리고 결국은 고아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삼켜버린다. 이 소설의 충격효과는 동심의 상징인 만화영화를 파멸적인 악몽의 드라마로 그려내는 그같은 강렬한 콘트라스트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 점은 피하고 싶은 과거의 트라우마와 죽음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몰아가는 이 고아 친구들의 죽음의 여행을 동심과 기대로 가득한 ‘소풍’이라는 반어적인 단어로 묘사하는 소설의 제목에서도 또 한 번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모든 폭력과 광기의 드라마의 기원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엔 바로 1980년 광주의 학살이 있었다. K와 그 친구들의 악몽이 시작되었던 1980년과 1981년, 고아 친구들이 살던 무허가 판자촌에는 광주의 학살 소식이 유언비어처럼 떠돌고 있었고 폭력 철거가 자행되고 있었으며 또 주변의 이웃이 소리소문없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를 통해 이 소설은 저 모든 비극의 근원으로 광기와 폭력으로 일그러진 1980년의 시대적 분위기를 지목한다. 계급적 박탈감과 소외와 가난 속에 방치된 판자촌의 고아들, 전염병 같은 시대의 폭력과 광기에 저도 몰래 감염되고 그것을 내면화해 스스로를 끔찍한 폭력의 한가운데로 몰아가는 아이들, 어른이 되어서도 매 순간 귀환하는 죽음과 공포의 망령에 사로잡히는 그들, 그리고 그 과거의 망령을 불러들여 기어이 그 속에 자기를 내맡기고 분열증적 주체로 살아가는 화자-주인공 K. 백민석은 이들의 분열증적 자기 파멸의 드라마를 통해 끊임없이 현재로 되돌아와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1980년대 폭력의 기억을 유니크한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헤이, 우리 소풍간다>는 불운한 소설이다. 한국소설의 관습을 멀리 뛰어넘는 파격적인 형식과 난해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소설은 당대에 충분히 인정받지도 못했고 이해되지도 못했다. 그것은 이 소설이 ‘1990년대 문학’이라는 당대의 제한적인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훌쩍 초월하는 강렬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언어가 당대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이를테면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영찬 문학평론가·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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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엽 기자 imher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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