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박인성 문학평론가
입력 2021.05.23 (21:40)
수정 2021.05.23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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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미래는 없습니다 - 김초엽 작가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SF에 대한 오해를 한다. SF는 발전한 과학기술이 그려내는 미래사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건 SF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일부의 아이콘(icon)에 불과하다. 과학기술은 미래의 시공간에 구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기술적 매개물에 불과할 뿐, SF라는 장르는 결국 하나의 독창적인 장르 이야기의 기술법이며, 이러한 장르소설을 읽어내기 위하여 과학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나 '이과적 감수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과학기술과 관련된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나면 시간 여행 장르처럼 SF의 하위장르 중에서도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환영받는 장르가 있는 한편, 아직도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처럼 대중적으로 환영받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본격적인 분야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SF는 통일된 장르가 아니라 다양한 하위장르들을 한꺼번에 가리키는 포괄적 용어에 가깝지만, 긍정적인 변화는 각각의 대중들에게도 각각의 하위장르들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친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초엽 작가의 등장과 성취는 한국 SF 문학이라는 우주선이 지난 세월 그려온 계보가 본격적인 궤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기존의 SF 마니아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독자 군이 유의미하게 생겨났으며, SF를 읽기 위한 마음의 준비나 과학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도 기꺼이 독립적인 장르문학을 접할 분위기가 형성된 셈이다.
약 10여 년 전쯤에 일부 SF 작가들을 본격문학의 영역에서 '장르문학적 상상력' 등으로 호명하면서 본격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을 수행했던 것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현상은 어디까지나 SF 장르문학의 독립적인 성취이면서 동시에 김초엽이라는 작가의 개성이 여실히 드러난 결과이기도 하다. 기존의 한국 SF 작가들의 지속적인 노력만큼이나 SF를 대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변화했다는 점을 우선 충분히 고려하면서, 크게 김초엽 작가의 소설을 대변하는 두 가지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은 좋은 SF이자 좋은 이야기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달성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의 수록작들은 정확한 SF적 관습과 도상을 활용하면서도, 장르적 법칙(law)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규칙(rule)을 활용하며 세련되게 갱신한다.
SF가 아주 클래식한 장르이며 오래된 관습들의 구성물임을 알고 있는 독자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장르적 관습이 낯선 독자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압축적인 세계를 전달하고 있다. 구구절절한 설정과 과도한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 중심의 플롯 진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독자가 장르적 문법에 스며들도록 유도한다.
특히 SF의 다양한 하위장르들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환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독자들로 하여금 오랜 관습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며, 거기에서부터 자신만의 주제의 전달로 나아가는 전달방식은 매우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스펙트럼」에서는 흔히 <스타트랙>과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나 외계인과의 퍼스트 콘택트를 다루는 장르에서 환기되는 근접 조우 규칙을 참고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낯선 행성의 무리인의 돌봄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약자의 입장에 놓인 주인공 '희진'의 상황을 섬세하게 전달한다.
중요한 것은 몇 대에 걸쳐서 희진을 돌보다가 죽어가는 무리인 가운데 '루이'라는 개체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연결성이다. 각각의 루이가 정말로 동일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음에도, 그들이 대를 이어서 희진을 돌보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은 우리가 쉽게 믿고 있는 단일 개체로서의 인격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게 한다.
희진이 사실상 "무력하고 유약한 이방인이었기에 환대받을 수 있었던"(94쪽)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격성 또한 사실은 외부에서 찾아온 무력한 손님이자 환대해야만 공존할 수 있는 외계성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 텍스트는 외계성과의 만남을 그려내는 퍼스트 콘택트를 참조하면서도, 정확하게 그 반대지점에서 외계성이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나'의 일부이자 동료라는 사실까지 나아가는 셈이다.
두 번째로, 김초엽 작가는 SF라는 장르가 너무나 현재적인 장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각인시켜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은 미래의 시공간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의 적극적으로 마찰하며, 미래에 대한 우리의 막연한 기대와 전망을 굴절시켜서 현재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보게 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아무리 선명한 고화질 이미지를 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삶의 해상도 자체가 변하지는 않듯이, 아무리 매끄럽게 사포질 된 미래의 시공간을 보여줄지라도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현재의 현실에는 울퉁불퉁하고 거친 요철들, 사회 구조의 단층과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 실재한다.
여성과 장애인이 그러하듯, 어쩌면 우리와 공존하고 있을지 모르는 외계의 존재들처럼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들은 바로 그러한 요철과 단층들에서 더욱 강력하게 들려온다.
이처럼 SF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현재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미래에 통해서 다시 보여주는 장르에 가깝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을 과학 기술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릴리 다우드나'가 만든 유전자 기술이 오히려 또 다른 미래의 차별을 만들어 내듯이, 중요한 것은 손상 있는 육체를 매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상을 차별이 아닌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성장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는 장애가 유전자 조작이나 발전된 신체보철물을 통해서 극복되리라는 나이브한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신체적 결함이 아니라 결함을 장애로, 다시 차별의 대상으로 만드는 사회적 구조와 인식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 SF라는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SF일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를 가장 정확하게 보는 방법은 그 시대에서 되도록 멀어져서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사이버펑크 장르의 대표작가로 유명한 윌리엄 깁슨이 남긴 말이 최근 한국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미래는 단순히 퍼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이 말하는 바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미래가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미래가 우리의 현재를 바꿀 수 있도록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 한,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가 아니라는 사실만이 드러날 뿐이다. 대부분의 시간 여행 이야기가 알려주는 가르침처럼, 언제나 그렇듯 진정한 투쟁과 변화의 장소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미래를 현재화하는 힘은 언제나 현재에 대한 변화의 힘과 동의어다. 과학이 안겨줄 풍요로움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를 개선하는 매끄러운 미래, 그런 미래는 없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은 자꾸만 현실을 매끄럽게 보여주려는 시도들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가장 동시대적인 SF 소설을 보여주고 있다.
박인성 문학평론가, 부산가톨릭대 교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SF에 대한 오해를 한다. SF는 발전한 과학기술이 그려내는 미래사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건 SF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일부의 아이콘(icon)에 불과하다. 과학기술은 미래의 시공간에 구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기술적 매개물에 불과할 뿐, SF라는 장르는 결국 하나의 독창적인 장르 이야기의 기술법이며, 이러한 장르소설을 읽어내기 위하여 과학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나 '이과적 감수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과학기술과 관련된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나면 시간 여행 장르처럼 SF의 하위장르 중에서도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환영받는 장르가 있는 한편, 아직도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처럼 대중적으로 환영받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본격적인 분야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SF는 통일된 장르가 아니라 다양한 하위장르들을 한꺼번에 가리키는 포괄적 용어에 가깝지만, 긍정적인 변화는 각각의 대중들에게도 각각의 하위장르들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친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초엽 작가의 등장과 성취는 한국 SF 문학이라는 우주선이 지난 세월 그려온 계보가 본격적인 궤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기존의 SF 마니아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독자 군이 유의미하게 생겨났으며, SF를 읽기 위한 마음의 준비나 과학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도 기꺼이 독립적인 장르문학을 접할 분위기가 형성된 셈이다.
약 10여 년 전쯤에 일부 SF 작가들을 본격문학의 영역에서 '장르문학적 상상력' 등으로 호명하면서 본격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을 수행했던 것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현상은 어디까지나 SF 장르문학의 독립적인 성취이면서 동시에 김초엽이라는 작가의 개성이 여실히 드러난 결과이기도 하다. 기존의 한국 SF 작가들의 지속적인 노력만큼이나 SF를 대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변화했다는 점을 우선 충분히 고려하면서, 크게 김초엽 작가의 소설을 대변하는 두 가지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은 좋은 SF이자 좋은 이야기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달성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의 수록작들은 정확한 SF적 관습과 도상을 활용하면서도, 장르적 법칙(law)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규칙(rule)을 활용하며 세련되게 갱신한다.
SF가 아주 클래식한 장르이며 오래된 관습들의 구성물임을 알고 있는 독자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장르적 관습이 낯선 독자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압축적인 세계를 전달하고 있다. 구구절절한 설정과 과도한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 중심의 플롯 진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독자가 장르적 문법에 스며들도록 유도한다.
특히 SF의 다양한 하위장르들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환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독자들로 하여금 오랜 관습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며, 거기에서부터 자신만의 주제의 전달로 나아가는 전달방식은 매우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스펙트럼」에서는 흔히 <스타트랙>과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나 외계인과의 퍼스트 콘택트를 다루는 장르에서 환기되는 근접 조우 규칙을 참고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낯선 행성의 무리인의 돌봄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약자의 입장에 놓인 주인공 '희진'의 상황을 섬세하게 전달한다.
중요한 것은 몇 대에 걸쳐서 희진을 돌보다가 죽어가는 무리인 가운데 '루이'라는 개체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연결성이다. 각각의 루이가 정말로 동일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음에도, 그들이 대를 이어서 희진을 돌보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은 우리가 쉽게 믿고 있는 단일 개체로서의 인격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게 한다.
희진이 사실상 "무력하고 유약한 이방인이었기에 환대받을 수 있었던"(94쪽)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격성 또한 사실은 외부에서 찾아온 무력한 손님이자 환대해야만 공존할 수 있는 외계성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 텍스트는 외계성과의 만남을 그려내는 퍼스트 콘택트를 참조하면서도, 정확하게 그 반대지점에서 외계성이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나'의 일부이자 동료라는 사실까지 나아가는 셈이다.
두 번째로, 김초엽 작가는 SF라는 장르가 너무나 현재적인 장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각인시켜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은 미래의 시공간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의 적극적으로 마찰하며, 미래에 대한 우리의 막연한 기대와 전망을 굴절시켜서 현재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보게 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아무리 선명한 고화질 이미지를 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삶의 해상도 자체가 변하지는 않듯이, 아무리 매끄럽게 사포질 된 미래의 시공간을 보여줄지라도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현재의 현실에는 울퉁불퉁하고 거친 요철들, 사회 구조의 단층과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 실재한다.
여성과 장애인이 그러하듯, 어쩌면 우리와 공존하고 있을지 모르는 외계의 존재들처럼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들은 바로 그러한 요철과 단층들에서 더욱 강력하게 들려온다.
이처럼 SF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현재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미래에 통해서 다시 보여주는 장르에 가깝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을 과학 기술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릴리 다우드나'가 만든 유전자 기술이 오히려 또 다른 미래의 차별을 만들어 내듯이, 중요한 것은 손상 있는 육체를 매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상을 차별이 아닌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성장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는 장애가 유전자 조작이나 발전된 신체보철물을 통해서 극복되리라는 나이브한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신체적 결함이 아니라 결함을 장애로, 다시 차별의 대상으로 만드는 사회적 구조와 인식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 SF라는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SF일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를 가장 정확하게 보는 방법은 그 시대에서 되도록 멀어져서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사이버펑크 장르의 대표작가로 유명한 윌리엄 깁슨이 남긴 말이 최근 한국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미래는 단순히 퍼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이 말하는 바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미래가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미래가 우리의 현재를 바꿀 수 있도록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 한,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가 아니라는 사실만이 드러날 뿐이다. 대부분의 시간 여행 이야기가 알려주는 가르침처럼, 언제나 그렇듯 진정한 투쟁과 변화의 장소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미래를 현재화하는 힘은 언제나 현재에 대한 변화의 힘과 동의어다. 과학이 안겨줄 풍요로움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를 개선하는 매끄러운 미래, 그런 미래는 없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은 자꾸만 현실을 매끄럽게 보여주려는 시도들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가장 동시대적인 SF 소설을 보여주고 있다.
박인성 문학평론가, 부산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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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박인성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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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05-23 21:40:11
- 수정2021-05-23 21:40:42
■그런 미래는 없습니다 - 김초엽 작가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SF에 대한 오해를 한다. SF는 발전한 과학기술이 그려내는 미래사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건 SF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일부의 아이콘(icon)에 불과하다. 과학기술은 미래의 시공간에 구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기술적 매개물에 불과할 뿐, SF라는 장르는 결국 하나의 독창적인 장르 이야기의 기술법이며, 이러한 장르소설을 읽어내기 위하여 과학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나 '이과적 감수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과학기술과 관련된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나면 시간 여행 장르처럼 SF의 하위장르 중에서도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환영받는 장르가 있는 한편, 아직도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처럼 대중적으로 환영받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본격적인 분야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SF는 통일된 장르가 아니라 다양한 하위장르들을 한꺼번에 가리키는 포괄적 용어에 가깝지만, 긍정적인 변화는 각각의 대중들에게도 각각의 하위장르들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친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초엽 작가의 등장과 성취는 한국 SF 문학이라는 우주선이 지난 세월 그려온 계보가 본격적인 궤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기존의 SF 마니아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독자 군이 유의미하게 생겨났으며, SF를 읽기 위한 마음의 준비나 과학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도 기꺼이 독립적인 장르문학을 접할 분위기가 형성된 셈이다.
약 10여 년 전쯤에 일부 SF 작가들을 본격문학의 영역에서 '장르문학적 상상력' 등으로 호명하면서 본격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을 수행했던 것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현상은 어디까지나 SF 장르문학의 독립적인 성취이면서 동시에 김초엽이라는 작가의 개성이 여실히 드러난 결과이기도 하다. 기존의 한국 SF 작가들의 지속적인 노력만큼이나 SF를 대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변화했다는 점을 우선 충분히 고려하면서, 크게 김초엽 작가의 소설을 대변하는 두 가지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은 좋은 SF이자 좋은 이야기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달성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의 수록작들은 정확한 SF적 관습과 도상을 활용하면서도, 장르적 법칙(law)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규칙(rule)을 활용하며 세련되게 갱신한다.
SF가 아주 클래식한 장르이며 오래된 관습들의 구성물임을 알고 있는 독자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장르적 관습이 낯선 독자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압축적인 세계를 전달하고 있다. 구구절절한 설정과 과도한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 중심의 플롯 진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독자가 장르적 문법에 스며들도록 유도한다.
특히 SF의 다양한 하위장르들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환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독자들로 하여금 오랜 관습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며, 거기에서부터 자신만의 주제의 전달로 나아가는 전달방식은 매우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스펙트럼」에서는 흔히 <스타트랙>과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나 외계인과의 퍼스트 콘택트를 다루는 장르에서 환기되는 근접 조우 규칙을 참고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낯선 행성의 무리인의 돌봄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약자의 입장에 놓인 주인공 '희진'의 상황을 섬세하게 전달한다.
중요한 것은 몇 대에 걸쳐서 희진을 돌보다가 죽어가는 무리인 가운데 '루이'라는 개체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연결성이다. 각각의 루이가 정말로 동일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음에도, 그들이 대를 이어서 희진을 돌보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은 우리가 쉽게 믿고 있는 단일 개체로서의 인격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게 한다.
희진이 사실상 "무력하고 유약한 이방인이었기에 환대받을 수 있었던"(94쪽)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격성 또한 사실은 외부에서 찾아온 무력한 손님이자 환대해야만 공존할 수 있는 외계성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 텍스트는 외계성과의 만남을 그려내는 퍼스트 콘택트를 참조하면서도, 정확하게 그 반대지점에서 외계성이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나'의 일부이자 동료라는 사실까지 나아가는 셈이다.
두 번째로, 김초엽 작가는 SF라는 장르가 너무나 현재적인 장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각인시켜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은 미래의 시공간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의 적극적으로 마찰하며, 미래에 대한 우리의 막연한 기대와 전망을 굴절시켜서 현재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보게 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아무리 선명한 고화질 이미지를 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삶의 해상도 자체가 변하지는 않듯이, 아무리 매끄럽게 사포질 된 미래의 시공간을 보여줄지라도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현재의 현실에는 울퉁불퉁하고 거친 요철들, 사회 구조의 단층과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 실재한다.
여성과 장애인이 그러하듯, 어쩌면 우리와 공존하고 있을지 모르는 외계의 존재들처럼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들은 바로 그러한 요철과 단층들에서 더욱 강력하게 들려온다.
이처럼 SF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현재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미래에 통해서 다시 보여주는 장르에 가깝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을 과학 기술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릴리 다우드나'가 만든 유전자 기술이 오히려 또 다른 미래의 차별을 만들어 내듯이, 중요한 것은 손상 있는 육체를 매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상을 차별이 아닌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성장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는 장애가 유전자 조작이나 발전된 신체보철물을 통해서 극복되리라는 나이브한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신체적 결함이 아니라 결함을 장애로, 다시 차별의 대상으로 만드는 사회적 구조와 인식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 SF라는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SF일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를 가장 정확하게 보는 방법은 그 시대에서 되도록 멀어져서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사이버펑크 장르의 대표작가로 유명한 윌리엄 깁슨이 남긴 말이 최근 한국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미래는 단순히 퍼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이 말하는 바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미래가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미래가 우리의 현재를 바꿀 수 있도록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 한,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가 아니라는 사실만이 드러날 뿐이다. 대부분의 시간 여행 이야기가 알려주는 가르침처럼, 언제나 그렇듯 진정한 투쟁과 변화의 장소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미래를 현재화하는 힘은 언제나 현재에 대한 변화의 힘과 동의어다. 과학이 안겨줄 풍요로움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를 개선하는 매끄러운 미래, 그런 미래는 없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은 자꾸만 현실을 매끄럽게 보여주려는 시도들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가장 동시대적인 SF 소설을 보여주고 있다.
박인성 문학평론가, 부산가톨릭대 교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SF에 대한 오해를 한다. SF는 발전한 과학기술이 그려내는 미래사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건 SF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일부의 아이콘(icon)에 불과하다. 과학기술은 미래의 시공간에 구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기술적 매개물에 불과할 뿐, SF라는 장르는 결국 하나의 독창적인 장르 이야기의 기술법이며, 이러한 장르소설을 읽어내기 위하여 과학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나 '이과적 감수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과학기술과 관련된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나면 시간 여행 장르처럼 SF의 하위장르 중에서도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환영받는 장르가 있는 한편, 아직도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처럼 대중적으로 환영받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본격적인 분야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SF는 통일된 장르가 아니라 다양한 하위장르들을 한꺼번에 가리키는 포괄적 용어에 가깝지만, 긍정적인 변화는 각각의 대중들에게도 각각의 하위장르들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친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초엽 작가의 등장과 성취는 한국 SF 문학이라는 우주선이 지난 세월 그려온 계보가 본격적인 궤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기존의 SF 마니아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독자 군이 유의미하게 생겨났으며, SF를 읽기 위한 마음의 준비나 과학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도 기꺼이 독립적인 장르문학을 접할 분위기가 형성된 셈이다.
약 10여 년 전쯤에 일부 SF 작가들을 본격문학의 영역에서 '장르문학적 상상력' 등으로 호명하면서 본격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을 수행했던 것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현상은 어디까지나 SF 장르문학의 독립적인 성취이면서 동시에 김초엽이라는 작가의 개성이 여실히 드러난 결과이기도 하다. 기존의 한국 SF 작가들의 지속적인 노력만큼이나 SF를 대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변화했다는 점을 우선 충분히 고려하면서, 크게 김초엽 작가의 소설을 대변하는 두 가지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은 좋은 SF이자 좋은 이야기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달성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의 수록작들은 정확한 SF적 관습과 도상을 활용하면서도, 장르적 법칙(law)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규칙(rule)을 활용하며 세련되게 갱신한다.
SF가 아주 클래식한 장르이며 오래된 관습들의 구성물임을 알고 있는 독자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장르적 관습이 낯선 독자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압축적인 세계를 전달하고 있다. 구구절절한 설정과 과도한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 중심의 플롯 진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독자가 장르적 문법에 스며들도록 유도한다.
특히 SF의 다양한 하위장르들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환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독자들로 하여금 오랜 관습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며, 거기에서부터 자신만의 주제의 전달로 나아가는 전달방식은 매우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스펙트럼」에서는 흔히 <스타트랙>과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나 외계인과의 퍼스트 콘택트를 다루는 장르에서 환기되는 근접 조우 규칙을 참고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낯선 행성의 무리인의 돌봄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약자의 입장에 놓인 주인공 '희진'의 상황을 섬세하게 전달한다.
중요한 것은 몇 대에 걸쳐서 희진을 돌보다가 죽어가는 무리인 가운데 '루이'라는 개체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연결성이다. 각각의 루이가 정말로 동일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음에도, 그들이 대를 이어서 희진을 돌보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은 우리가 쉽게 믿고 있는 단일 개체로서의 인격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게 한다.
희진이 사실상 "무력하고 유약한 이방인이었기에 환대받을 수 있었던"(94쪽)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격성 또한 사실은 외부에서 찾아온 무력한 손님이자 환대해야만 공존할 수 있는 외계성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 텍스트는 외계성과의 만남을 그려내는 퍼스트 콘택트를 참조하면서도, 정확하게 그 반대지점에서 외계성이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나'의 일부이자 동료라는 사실까지 나아가는 셈이다.
두 번째로, 김초엽 작가는 SF라는 장르가 너무나 현재적인 장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각인시켜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은 미래의 시공간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의 적극적으로 마찰하며, 미래에 대한 우리의 막연한 기대와 전망을 굴절시켜서 현재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보게 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아무리 선명한 고화질 이미지를 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삶의 해상도 자체가 변하지는 않듯이, 아무리 매끄럽게 사포질 된 미래의 시공간을 보여줄지라도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현재의 현실에는 울퉁불퉁하고 거친 요철들, 사회 구조의 단층과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 실재한다.
여성과 장애인이 그러하듯, 어쩌면 우리와 공존하고 있을지 모르는 외계의 존재들처럼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들은 바로 그러한 요철과 단층들에서 더욱 강력하게 들려온다.
이처럼 SF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현재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미래에 통해서 다시 보여주는 장르에 가깝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을 과학 기술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릴리 다우드나'가 만든 유전자 기술이 오히려 또 다른 미래의 차별을 만들어 내듯이, 중요한 것은 손상 있는 육체를 매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상을 차별이 아닌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성장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는 장애가 유전자 조작이나 발전된 신체보철물을 통해서 극복되리라는 나이브한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신체적 결함이 아니라 결함을 장애로, 다시 차별의 대상으로 만드는 사회적 구조와 인식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 SF라는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SF일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를 가장 정확하게 보는 방법은 그 시대에서 되도록 멀어져서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사이버펑크 장르의 대표작가로 유명한 윌리엄 깁슨이 남긴 말이 최근 한국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미래는 단순히 퍼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이 말하는 바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미래가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미래가 우리의 현재를 바꿀 수 있도록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 한,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가 아니라는 사실만이 드러날 뿐이다. 대부분의 시간 여행 이야기가 알려주는 가르침처럼, 언제나 그렇듯 진정한 투쟁과 변화의 장소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미래를 현재화하는 힘은 언제나 현재에 대한 변화의 힘과 동의어다. 과학이 안겨줄 풍요로움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를 개선하는 매끄러운 미래, 그런 미래는 없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들은 자꾸만 현실을 매끄럽게 보여주려는 시도들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가장 동시대적인 SF 소설을 보여주고 있다.
박인성 문학평론가, 부산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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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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