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폭력에 맞서는 정신과 영혼 - 정찬의 ‘완전한 영혼’
입력 2022.01.23 (21:30)
수정 2022.01.2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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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맞서는 정신과 영혼 - 정찬의 「완전한 영혼」
정찬의 「완전한 영혼」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보는 까닭은 이 소설에 그의 문학세계를 관류하는 의미들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 계열의 중심에 폭력이 놓여 있다. 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파괴적인 학살과 더불어 이후 독재 권력에 의해 80년대 내내 진행된 감시, 수배, 구금, 폭행, 고문 등, 다양한 폭력의 위상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구성은 이와 같은 폭력 사실의 서술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이보다 폭력에 직면하거나 그에 맞서는 사람의 내면, 의식, 정신, 영혼의 문제에 집중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학을 지향하며 나아가서 폭력의 철학에 이르려는 염원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소설사에서 독보적이다. 어떠한 역사적 상황은 폭력의 주체와 객체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이 소설은 다분히 객체의 측면에서 서술되고 있지만, 나중에 주체와 객체 모두 정찬 소설의 대상이 된다. 과연 인간은 폭력에 맞서서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저항적 폭력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증오 없는 저항은 가능한가? 이와 같은 성찰의 벡터가 이 소설의 점층하는 구성을 만든다.
분류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완전한 영혼」을 오월 문학이나 후일담 소설로 규정하기도 한다. 서사의 발원이 5월의 광주인 만큼 오월 문학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80년대를 통과하고 90년대 초반에 이르러 지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후일담에 속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함에도 이 소설은 80년 오월을 증언하려는 의도를 지니지 않는다. 이미 오월은 운동권으로 불의에 저항하다 고문을 당하기도 한 서술자 ‘나’에게 중대한 존재 전환의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진실을 거듭 확인하는 과정보다 그로부터 비롯한 변혁의 과제가 중대하다. 하지만 6월 항쟁 이후 진보세력의 분열로 군부 정권이 연장되는 한편 세계 체제의 급변이 초래한 이념적 정향의 실종으로 혼돈에 직면한다. 바로 이와 같은 90년대 초반의 상황 속에서 이 소설이 출현한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한다. 이념의 실종과 사상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생성을 갈망하는 안간힘이 이 소설의 발생 배경이다. 만약에 과거를 회억하면서 황망한 결산을 서둘렀다면 후일담의 청산주의라는 오명을 벗긴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와 같은 청산주의가 아니라 사상의 변증과 생성의 염원으로 나아간다. 이 점이 「완전한 영혼」을 다시 읽어야 하는 현대의 고전이 되게 한다.
이 소설에서 서술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일인칭 ‘나’이다. ‘나’는 ‘이 형’으로 지칭될 뿐 그 이름을 알 수 없으니 여전한 현존으로 남는다. 이러한 서술자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지닌 이가 선배 활동가 ‘지성수’이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이가 ‘장인하’이다. 이 소설이 단순한 회고에 그치지 않고 87 체제 이후를 사유한다는 판단은 세 사람의 인물 배치와 연관된다. 전망이 닫히면서 좌절한 ‘나’는 지성수를 통하여 ‘패배와 죽음의 풍경’을 견뎌내는 의지를 배우고 ‘치욕과 절망의 동굴’에서 이끌려 나오게 된다. 이 소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벡터는 서술자 ‘나’가 여타의 인물을 관찰하는 데 있지 않으며 그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인식을 높여가는 방향에서 생성한다. 먼저 누구보다 80년 광주에서 상처를 입고 줄곧 비통한 죽음과 함께 한 일이 있는 장인하를 알아가는 과정이 있다. 폭력으로 청력을 잃은 그는 ‘나’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독특한 내면세계를 지닌 이로 다가온다. 그는 트라우마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고 투명하며 무구한 성격을 지닌 존재이다. 그런데 지성수와 전혀 다른 성격의 장인하가 ‘나’의 상처를 위무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치열한 정신으로 무장한 변혁운동가가 지성수라면 ‘풀냄새가 나는 듯한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을 지닌 이가 장인하이다. 장인하는 ‘인간의 오만한 사고 체계’와 거리가 먼 시원의 생명이 내는 소리를 듣는 ‘지독한 무구’를 간직한 사람이다. 이러한 그이지만 5월이 되면 그도 트라우마의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장인하의 돌연한 죽음으로 ‘나’는 지성수가 장인하를 통하여 자신의 사상적 실천의 한계를 체득하고 회심의 계기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서사적 전환이 이뤄지는데, 이게 이 소설이 도달하려는 요체라 할 수 있다.
대개 폭력으로 입은 상처는 원한과 복수, ‘균형을 잃은 증오’로 사람을 일그러지게 한다. 권력의 파괴적 폭력에 상응하는 저항적 폭력도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는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 장인하를 통하여 지성수는 ‘무사상적 인간’과 만난다. 무사상적 인간의 허약함을 비판하던 그가 ‘악을 모르는 정신’, 증오가 없는 삶을 이해하게 된다. 폭력에 대하여 장인하는 증오를 품지 않으면서 ‘비통과 슬픔’으로 대응한다. 철저하게 사상적인 인간인 지성수는 잔인하고 처절한 절망의 풍경 속에서 장인하를 떠올리게 된다. “그의 몸에 들끓고 있던 공포와 분노와 저항과 갈망을 무화해”버린 장인하를 그는 ‘식물적 정신’이라고 말한다. ‘나’ 또한 분노하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장인하가 ‘고통에 저항하지 않는 정신’을 지녔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지성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상적 전향이 아니다. 세계를 절대화하는 예언자적 열정으로 자신을 몰아간 오만에 대한 반성이다. “신의 빛이 없는 예언자의 영혼이 허물어졌을 때”에 나타나는 귀결은 “죽음의 풍경”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그에게 “장인하는 죽음의 풍경에 나타난 유일한 생명”이다. 그를 다시 발견하면서 지성수는 생명을 압살하는 절대성이 아니라 ‘반성과 겸손이라는 자양분 속에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꽃피우는 방향을 상정한다. 장인하를 매개로 증오로 일그러진 죽음의 풍경을 전환하는 변증이 가능하게 된다. 이를 지성수는 “사상 속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라고 명명한다.
이 소설에는 다양한 폭력의 위상이 있다. 장인하처럼 우연히 폭력과 맞닥뜨리면서 생명의 자발성으로 대처하기도 하고 변혁운동가인 지성수와 ‘나’처럼 저항으로 맞서면서 인간성이 파괴되는 폭압적인 고문에 직면하기도 한다. 또한, 불의에 분노하며 스스로 죽음으로 이끄는 자살의 행위가 있다. 광주의 절망에서 시작하여 80년대라는 폭력의 시대가 보여준 죽음의 풍경이다. 정찬의 「완전한 영혼」은 이와 같은 죽음의 풍경을 넘어서 생명이 풍경을 생성하고자 하는 정신의 모험을 담는다. 우리는 장인하의 얼굴에서 폭력의 체제에 사랑과 슬픔으로 대응하는 예수의 흔적을 읽을 수도 있다. 생명이 없다면 진정한 자유의 공간이 열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이 소설이 21세기에 던지는 핵심 명제이다. 작가는 각고의 노력 끝에 장인하라는 한 인물을 창조하였다. 지성수의 회심이나 그를 배우고 따르는 서술자 ‘나’의 의지는 여전한 진행형이다. 세계는 평화를 위장하고 있을 뿐, 그 이면에 도사린 폭력의 체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폭력에 맞서는 정신이 폐허로 귀착하지 않고 생명으로 생성하는 사유와 실천은 지속되어야만 한다.
구모룡/문학평론가·한국해양대 교수
정찬의 「완전한 영혼」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보는 까닭은 이 소설에 그의 문학세계를 관류하는 의미들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 계열의 중심에 폭력이 놓여 있다. 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파괴적인 학살과 더불어 이후 독재 권력에 의해 80년대 내내 진행된 감시, 수배, 구금, 폭행, 고문 등, 다양한 폭력의 위상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구성은 이와 같은 폭력 사실의 서술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이보다 폭력에 직면하거나 그에 맞서는 사람의 내면, 의식, 정신, 영혼의 문제에 집중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학을 지향하며 나아가서 폭력의 철학에 이르려는 염원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소설사에서 독보적이다. 어떠한 역사적 상황은 폭력의 주체와 객체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이 소설은 다분히 객체의 측면에서 서술되고 있지만, 나중에 주체와 객체 모두 정찬 소설의 대상이 된다. 과연 인간은 폭력에 맞서서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저항적 폭력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증오 없는 저항은 가능한가? 이와 같은 성찰의 벡터가 이 소설의 점층하는 구성을 만든다.
분류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완전한 영혼」을 오월 문학이나 후일담 소설로 규정하기도 한다. 서사의 발원이 5월의 광주인 만큼 오월 문학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80년대를 통과하고 90년대 초반에 이르러 지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후일담에 속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함에도 이 소설은 80년 오월을 증언하려는 의도를 지니지 않는다. 이미 오월은 운동권으로 불의에 저항하다 고문을 당하기도 한 서술자 ‘나’에게 중대한 존재 전환의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진실을 거듭 확인하는 과정보다 그로부터 비롯한 변혁의 과제가 중대하다. 하지만 6월 항쟁 이후 진보세력의 분열로 군부 정권이 연장되는 한편 세계 체제의 급변이 초래한 이념적 정향의 실종으로 혼돈에 직면한다. 바로 이와 같은 90년대 초반의 상황 속에서 이 소설이 출현한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한다. 이념의 실종과 사상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생성을 갈망하는 안간힘이 이 소설의 발생 배경이다. 만약에 과거를 회억하면서 황망한 결산을 서둘렀다면 후일담의 청산주의라는 오명을 벗긴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와 같은 청산주의가 아니라 사상의 변증과 생성의 염원으로 나아간다. 이 점이 「완전한 영혼」을 다시 읽어야 하는 현대의 고전이 되게 한다.
이 소설에서 서술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일인칭 ‘나’이다. ‘나’는 ‘이 형’으로 지칭될 뿐 그 이름을 알 수 없으니 여전한 현존으로 남는다. 이러한 서술자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지닌 이가 선배 활동가 ‘지성수’이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이가 ‘장인하’이다. 이 소설이 단순한 회고에 그치지 않고 87 체제 이후를 사유한다는 판단은 세 사람의 인물 배치와 연관된다. 전망이 닫히면서 좌절한 ‘나’는 지성수를 통하여 ‘패배와 죽음의 풍경’을 견뎌내는 의지를 배우고 ‘치욕과 절망의 동굴’에서 이끌려 나오게 된다. 이 소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벡터는 서술자 ‘나’가 여타의 인물을 관찰하는 데 있지 않으며 그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인식을 높여가는 방향에서 생성한다. 먼저 누구보다 80년 광주에서 상처를 입고 줄곧 비통한 죽음과 함께 한 일이 있는 장인하를 알아가는 과정이 있다. 폭력으로 청력을 잃은 그는 ‘나’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독특한 내면세계를 지닌 이로 다가온다. 그는 트라우마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고 투명하며 무구한 성격을 지닌 존재이다. 그런데 지성수와 전혀 다른 성격의 장인하가 ‘나’의 상처를 위무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치열한 정신으로 무장한 변혁운동가가 지성수라면 ‘풀냄새가 나는 듯한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을 지닌 이가 장인하이다. 장인하는 ‘인간의 오만한 사고 체계’와 거리가 먼 시원의 생명이 내는 소리를 듣는 ‘지독한 무구’를 간직한 사람이다. 이러한 그이지만 5월이 되면 그도 트라우마의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장인하의 돌연한 죽음으로 ‘나’는 지성수가 장인하를 통하여 자신의 사상적 실천의 한계를 체득하고 회심의 계기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서사적 전환이 이뤄지는데, 이게 이 소설이 도달하려는 요체라 할 수 있다.
대개 폭력으로 입은 상처는 원한과 복수, ‘균형을 잃은 증오’로 사람을 일그러지게 한다. 권력의 파괴적 폭력에 상응하는 저항적 폭력도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는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 장인하를 통하여 지성수는 ‘무사상적 인간’과 만난다. 무사상적 인간의 허약함을 비판하던 그가 ‘악을 모르는 정신’, 증오가 없는 삶을 이해하게 된다. 폭력에 대하여 장인하는 증오를 품지 않으면서 ‘비통과 슬픔’으로 대응한다. 철저하게 사상적인 인간인 지성수는 잔인하고 처절한 절망의 풍경 속에서 장인하를 떠올리게 된다. “그의 몸에 들끓고 있던 공포와 분노와 저항과 갈망을 무화해”버린 장인하를 그는 ‘식물적 정신’이라고 말한다. ‘나’ 또한 분노하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장인하가 ‘고통에 저항하지 않는 정신’을 지녔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지성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상적 전향이 아니다. 세계를 절대화하는 예언자적 열정으로 자신을 몰아간 오만에 대한 반성이다. “신의 빛이 없는 예언자의 영혼이 허물어졌을 때”에 나타나는 귀결은 “죽음의 풍경”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그에게 “장인하는 죽음의 풍경에 나타난 유일한 생명”이다. 그를 다시 발견하면서 지성수는 생명을 압살하는 절대성이 아니라 ‘반성과 겸손이라는 자양분 속에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꽃피우는 방향을 상정한다. 장인하를 매개로 증오로 일그러진 죽음의 풍경을 전환하는 변증이 가능하게 된다. 이를 지성수는 “사상 속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라고 명명한다.
이 소설에는 다양한 폭력의 위상이 있다. 장인하처럼 우연히 폭력과 맞닥뜨리면서 생명의 자발성으로 대처하기도 하고 변혁운동가인 지성수와 ‘나’처럼 저항으로 맞서면서 인간성이 파괴되는 폭압적인 고문에 직면하기도 한다. 또한, 불의에 분노하며 스스로 죽음으로 이끄는 자살의 행위가 있다. 광주의 절망에서 시작하여 80년대라는 폭력의 시대가 보여준 죽음의 풍경이다. 정찬의 「완전한 영혼」은 이와 같은 죽음의 풍경을 넘어서 생명이 풍경을 생성하고자 하는 정신의 모험을 담는다. 우리는 장인하의 얼굴에서 폭력의 체제에 사랑과 슬픔으로 대응하는 예수의 흔적을 읽을 수도 있다. 생명이 없다면 진정한 자유의 공간이 열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이 소설이 21세기에 던지는 핵심 명제이다. 작가는 각고의 노력 끝에 장인하라는 한 인물을 창조하였다. 지성수의 회심이나 그를 배우고 따르는 서술자 ‘나’의 의지는 여전한 진행형이다. 세계는 평화를 위장하고 있을 뿐, 그 이면에 도사린 폭력의 체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폭력에 맞서는 정신이 폐허로 귀착하지 않고 생명으로 생성하는 사유와 실천은 지속되어야만 한다.
구모룡/문학평론가·한국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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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 폭력에 맞서는 정신과 영혼 - 정찬의 ‘완전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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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2-01-23 21:30:13
- 수정2022-01-23 21:30:36
폭력에 맞서는 정신과 영혼 - 정찬의 「완전한 영혼」
정찬의 「완전한 영혼」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보는 까닭은 이 소설에 그의 문학세계를 관류하는 의미들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 계열의 중심에 폭력이 놓여 있다. 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파괴적인 학살과 더불어 이후 독재 권력에 의해 80년대 내내 진행된 감시, 수배, 구금, 폭행, 고문 등, 다양한 폭력의 위상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구성은 이와 같은 폭력 사실의 서술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이보다 폭력에 직면하거나 그에 맞서는 사람의 내면, 의식, 정신, 영혼의 문제에 집중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학을 지향하며 나아가서 폭력의 철학에 이르려는 염원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소설사에서 독보적이다. 어떠한 역사적 상황은 폭력의 주체와 객체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이 소설은 다분히 객체의 측면에서 서술되고 있지만, 나중에 주체와 객체 모두 정찬 소설의 대상이 된다. 과연 인간은 폭력에 맞서서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저항적 폭력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증오 없는 저항은 가능한가? 이와 같은 성찰의 벡터가 이 소설의 점층하는 구성을 만든다.
분류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완전한 영혼」을 오월 문학이나 후일담 소설로 규정하기도 한다. 서사의 발원이 5월의 광주인 만큼 오월 문학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80년대를 통과하고 90년대 초반에 이르러 지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후일담에 속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함에도 이 소설은 80년 오월을 증언하려는 의도를 지니지 않는다. 이미 오월은 운동권으로 불의에 저항하다 고문을 당하기도 한 서술자 ‘나’에게 중대한 존재 전환의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진실을 거듭 확인하는 과정보다 그로부터 비롯한 변혁의 과제가 중대하다. 하지만 6월 항쟁 이후 진보세력의 분열로 군부 정권이 연장되는 한편 세계 체제의 급변이 초래한 이념적 정향의 실종으로 혼돈에 직면한다. 바로 이와 같은 90년대 초반의 상황 속에서 이 소설이 출현한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한다. 이념의 실종과 사상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생성을 갈망하는 안간힘이 이 소설의 발생 배경이다. 만약에 과거를 회억하면서 황망한 결산을 서둘렀다면 후일담의 청산주의라는 오명을 벗긴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와 같은 청산주의가 아니라 사상의 변증과 생성의 염원으로 나아간다. 이 점이 「완전한 영혼」을 다시 읽어야 하는 현대의 고전이 되게 한다.
이 소설에서 서술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일인칭 ‘나’이다. ‘나’는 ‘이 형’으로 지칭될 뿐 그 이름을 알 수 없으니 여전한 현존으로 남는다. 이러한 서술자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지닌 이가 선배 활동가 ‘지성수’이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이가 ‘장인하’이다. 이 소설이 단순한 회고에 그치지 않고 87 체제 이후를 사유한다는 판단은 세 사람의 인물 배치와 연관된다. 전망이 닫히면서 좌절한 ‘나’는 지성수를 통하여 ‘패배와 죽음의 풍경’을 견뎌내는 의지를 배우고 ‘치욕과 절망의 동굴’에서 이끌려 나오게 된다. 이 소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벡터는 서술자 ‘나’가 여타의 인물을 관찰하는 데 있지 않으며 그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인식을 높여가는 방향에서 생성한다. 먼저 누구보다 80년 광주에서 상처를 입고 줄곧 비통한 죽음과 함께 한 일이 있는 장인하를 알아가는 과정이 있다. 폭력으로 청력을 잃은 그는 ‘나’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독특한 내면세계를 지닌 이로 다가온다. 그는 트라우마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고 투명하며 무구한 성격을 지닌 존재이다. 그런데 지성수와 전혀 다른 성격의 장인하가 ‘나’의 상처를 위무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치열한 정신으로 무장한 변혁운동가가 지성수라면 ‘풀냄새가 나는 듯한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을 지닌 이가 장인하이다. 장인하는 ‘인간의 오만한 사고 체계’와 거리가 먼 시원의 생명이 내는 소리를 듣는 ‘지독한 무구’를 간직한 사람이다. 이러한 그이지만 5월이 되면 그도 트라우마의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장인하의 돌연한 죽음으로 ‘나’는 지성수가 장인하를 통하여 자신의 사상적 실천의 한계를 체득하고 회심의 계기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서사적 전환이 이뤄지는데, 이게 이 소설이 도달하려는 요체라 할 수 있다.
대개 폭력으로 입은 상처는 원한과 복수, ‘균형을 잃은 증오’로 사람을 일그러지게 한다. 권력의 파괴적 폭력에 상응하는 저항적 폭력도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는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 장인하를 통하여 지성수는 ‘무사상적 인간’과 만난다. 무사상적 인간의 허약함을 비판하던 그가 ‘악을 모르는 정신’, 증오가 없는 삶을 이해하게 된다. 폭력에 대하여 장인하는 증오를 품지 않으면서 ‘비통과 슬픔’으로 대응한다. 철저하게 사상적인 인간인 지성수는 잔인하고 처절한 절망의 풍경 속에서 장인하를 떠올리게 된다. “그의 몸에 들끓고 있던 공포와 분노와 저항과 갈망을 무화해”버린 장인하를 그는 ‘식물적 정신’이라고 말한다. ‘나’ 또한 분노하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장인하가 ‘고통에 저항하지 않는 정신’을 지녔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지성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상적 전향이 아니다. 세계를 절대화하는 예언자적 열정으로 자신을 몰아간 오만에 대한 반성이다. “신의 빛이 없는 예언자의 영혼이 허물어졌을 때”에 나타나는 귀결은 “죽음의 풍경”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그에게 “장인하는 죽음의 풍경에 나타난 유일한 생명”이다. 그를 다시 발견하면서 지성수는 생명을 압살하는 절대성이 아니라 ‘반성과 겸손이라는 자양분 속에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꽃피우는 방향을 상정한다. 장인하를 매개로 증오로 일그러진 죽음의 풍경을 전환하는 변증이 가능하게 된다. 이를 지성수는 “사상 속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라고 명명한다.
이 소설에는 다양한 폭력의 위상이 있다. 장인하처럼 우연히 폭력과 맞닥뜨리면서 생명의 자발성으로 대처하기도 하고 변혁운동가인 지성수와 ‘나’처럼 저항으로 맞서면서 인간성이 파괴되는 폭압적인 고문에 직면하기도 한다. 또한, 불의에 분노하며 스스로 죽음으로 이끄는 자살의 행위가 있다. 광주의 절망에서 시작하여 80년대라는 폭력의 시대가 보여준 죽음의 풍경이다. 정찬의 「완전한 영혼」은 이와 같은 죽음의 풍경을 넘어서 생명이 풍경을 생성하고자 하는 정신의 모험을 담는다. 우리는 장인하의 얼굴에서 폭력의 체제에 사랑과 슬픔으로 대응하는 예수의 흔적을 읽을 수도 있다. 생명이 없다면 진정한 자유의 공간이 열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이 소설이 21세기에 던지는 핵심 명제이다. 작가는 각고의 노력 끝에 장인하라는 한 인물을 창조하였다. 지성수의 회심이나 그를 배우고 따르는 서술자 ‘나’의 의지는 여전한 진행형이다. 세계는 평화를 위장하고 있을 뿐, 그 이면에 도사린 폭력의 체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폭력에 맞서는 정신이 폐허로 귀착하지 않고 생명으로 생성하는 사유와 실천은 지속되어야만 한다.
구모룡/문학평론가·한국해양대 교수
정찬의 「완전한 영혼」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보는 까닭은 이 소설에 그의 문학세계를 관류하는 의미들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 계열의 중심에 폭력이 놓여 있다. 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파괴적인 학살과 더불어 이후 독재 권력에 의해 80년대 내내 진행된 감시, 수배, 구금, 폭행, 고문 등, 다양한 폭력의 위상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구성은 이와 같은 폭력 사실의 서술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이보다 폭력에 직면하거나 그에 맞서는 사람의 내면, 의식, 정신, 영혼의 문제에 집중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학을 지향하며 나아가서 폭력의 철학에 이르려는 염원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소설사에서 독보적이다. 어떠한 역사적 상황은 폭력의 주체와 객체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이 소설은 다분히 객체의 측면에서 서술되고 있지만, 나중에 주체와 객체 모두 정찬 소설의 대상이 된다. 과연 인간은 폭력에 맞서서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저항적 폭력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증오 없는 저항은 가능한가? 이와 같은 성찰의 벡터가 이 소설의 점층하는 구성을 만든다.
분류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완전한 영혼」을 오월 문학이나 후일담 소설로 규정하기도 한다. 서사의 발원이 5월의 광주인 만큼 오월 문학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80년대를 통과하고 90년대 초반에 이르러 지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후일담에 속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함에도 이 소설은 80년 오월을 증언하려는 의도를 지니지 않는다. 이미 오월은 운동권으로 불의에 저항하다 고문을 당하기도 한 서술자 ‘나’에게 중대한 존재 전환의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진실을 거듭 확인하는 과정보다 그로부터 비롯한 변혁의 과제가 중대하다. 하지만 6월 항쟁 이후 진보세력의 분열로 군부 정권이 연장되는 한편 세계 체제의 급변이 초래한 이념적 정향의 실종으로 혼돈에 직면한다. 바로 이와 같은 90년대 초반의 상황 속에서 이 소설이 출현한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한다. 이념의 실종과 사상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생성을 갈망하는 안간힘이 이 소설의 발생 배경이다. 만약에 과거를 회억하면서 황망한 결산을 서둘렀다면 후일담의 청산주의라는 오명을 벗긴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와 같은 청산주의가 아니라 사상의 변증과 생성의 염원으로 나아간다. 이 점이 「완전한 영혼」을 다시 읽어야 하는 현대의 고전이 되게 한다.
이 소설에서 서술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일인칭 ‘나’이다. ‘나’는 ‘이 형’으로 지칭될 뿐 그 이름을 알 수 없으니 여전한 현존으로 남는다. 이러한 서술자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지닌 이가 선배 활동가 ‘지성수’이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이가 ‘장인하’이다. 이 소설이 단순한 회고에 그치지 않고 87 체제 이후를 사유한다는 판단은 세 사람의 인물 배치와 연관된다. 전망이 닫히면서 좌절한 ‘나’는 지성수를 통하여 ‘패배와 죽음의 풍경’을 견뎌내는 의지를 배우고 ‘치욕과 절망의 동굴’에서 이끌려 나오게 된다. 이 소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벡터는 서술자 ‘나’가 여타의 인물을 관찰하는 데 있지 않으며 그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인식을 높여가는 방향에서 생성한다. 먼저 누구보다 80년 광주에서 상처를 입고 줄곧 비통한 죽음과 함께 한 일이 있는 장인하를 알아가는 과정이 있다. 폭력으로 청력을 잃은 그는 ‘나’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독특한 내면세계를 지닌 이로 다가온다. 그는 트라우마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고 투명하며 무구한 성격을 지닌 존재이다. 그런데 지성수와 전혀 다른 성격의 장인하가 ‘나’의 상처를 위무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치열한 정신으로 무장한 변혁운동가가 지성수라면 ‘풀냄새가 나는 듯한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을 지닌 이가 장인하이다. 장인하는 ‘인간의 오만한 사고 체계’와 거리가 먼 시원의 생명이 내는 소리를 듣는 ‘지독한 무구’를 간직한 사람이다. 이러한 그이지만 5월이 되면 그도 트라우마의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장인하의 돌연한 죽음으로 ‘나’는 지성수가 장인하를 통하여 자신의 사상적 실천의 한계를 체득하고 회심의 계기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서사적 전환이 이뤄지는데, 이게 이 소설이 도달하려는 요체라 할 수 있다.
대개 폭력으로 입은 상처는 원한과 복수, ‘균형을 잃은 증오’로 사람을 일그러지게 한다. 권력의 파괴적 폭력에 상응하는 저항적 폭력도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는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 장인하를 통하여 지성수는 ‘무사상적 인간’과 만난다. 무사상적 인간의 허약함을 비판하던 그가 ‘악을 모르는 정신’, 증오가 없는 삶을 이해하게 된다. 폭력에 대하여 장인하는 증오를 품지 않으면서 ‘비통과 슬픔’으로 대응한다. 철저하게 사상적인 인간인 지성수는 잔인하고 처절한 절망의 풍경 속에서 장인하를 떠올리게 된다. “그의 몸에 들끓고 있던 공포와 분노와 저항과 갈망을 무화해”버린 장인하를 그는 ‘식물적 정신’이라고 말한다. ‘나’ 또한 분노하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장인하가 ‘고통에 저항하지 않는 정신’을 지녔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지성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상적 전향이 아니다. 세계를 절대화하는 예언자적 열정으로 자신을 몰아간 오만에 대한 반성이다. “신의 빛이 없는 예언자의 영혼이 허물어졌을 때”에 나타나는 귀결은 “죽음의 풍경”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그에게 “장인하는 죽음의 풍경에 나타난 유일한 생명”이다. 그를 다시 발견하면서 지성수는 생명을 압살하는 절대성이 아니라 ‘반성과 겸손이라는 자양분 속에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꽃피우는 방향을 상정한다. 장인하를 매개로 증오로 일그러진 죽음의 풍경을 전환하는 변증이 가능하게 된다. 이를 지성수는 “사상 속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라고 명명한다.
이 소설에는 다양한 폭력의 위상이 있다. 장인하처럼 우연히 폭력과 맞닥뜨리면서 생명의 자발성으로 대처하기도 하고 변혁운동가인 지성수와 ‘나’처럼 저항으로 맞서면서 인간성이 파괴되는 폭압적인 고문에 직면하기도 한다. 또한, 불의에 분노하며 스스로 죽음으로 이끄는 자살의 행위가 있다. 광주의 절망에서 시작하여 80년대라는 폭력의 시대가 보여준 죽음의 풍경이다. 정찬의 「완전한 영혼」은 이와 같은 죽음의 풍경을 넘어서 생명이 풍경을 생성하고자 하는 정신의 모험을 담는다. 우리는 장인하의 얼굴에서 폭력의 체제에 사랑과 슬픔으로 대응하는 예수의 흔적을 읽을 수도 있다. 생명이 없다면 진정한 자유의 공간이 열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이 소설이 21세기에 던지는 핵심 명제이다. 작가는 각고의 노력 끝에 장인하라는 한 인물을 창조하였다. 지성수의 회심이나 그를 배우고 따르는 서술자 ‘나’의 의지는 여전한 진행형이다. 세계는 평화를 위장하고 있을 뿐, 그 이면에 도사린 폭력의 체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폭력에 맞서는 정신이 폐허로 귀착하지 않고 생명으로 생성하는 사유와 실천은 지속되어야만 한다.
구모룡/문학평론가·한국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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