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픽] “정말 감사합니다”…‘푸른 눈의 성자’ 두봉 주교가 남긴 마지막 말
입력 2025.04.14 (18:32)
수정 2025.04.14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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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을 쓰고 부채를 든 파란 눈의 외국인.
프랑스 출신의 '르네 뒤퐁' 세례명 레나토 신부님입니다.
우리에겐 '두봉 주교'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죠.
70년 넘게 헌신의 삶을 살아온 이분.
뇌경색 수술을 받고 나흘 만인 지난 10일, 향년 96세로 선종해 오늘 안동교구 성직자 묘원에 묻혔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를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기억합니다.
[KBS 다큐 '두봉 주교의 어떤 고향'/2011년 12월 25일 : "누님이십니다. 난 여든셋밖에 안 됐는데 어린애죠 뭐."]
파란 눈의 선한 얼굴, 갑작스런 파안대소는 한번 본 사람도 그 인간미에 녹아들게 만듭니다.
[KBS 다큐 '두봉 주교의 어떤 고향'/2011년 12월 25일 : "우리 동네 아줌마들하고 이렇게."]
1954년 스물다섯 앳된 청년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은 두봉 주교.
전쟁 직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에 온 걸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KBS '라이브 오늘' : "나도 그런 나라로 가서, 힘껏, 힘껏! 마음껏 이렇게 도와줄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서, 그랬어요."]
1969년 안동에서 첫 교구장을 맡은 후, 그가 내건 모토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가톨릭 농민회를 세우고, 한센병 환자를 위한 전문 의원을 만드는 등 묵묵히 고집스레 가장 소외된 이들 편에만 섰습니다.
[KBS '11시에 만납시다' : "좋습니다. 나 스스로가 안동 사람이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순진무구한 얼굴과 미소를 지녔지만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서겠다는 '신념'은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1978년 불량 씨감자 공급에 반발하던 안동교구 신자가 정부에 납치 당하는 이른바 '오원춘 사건' 당시, 이를 직접 항의하다 추방령을 받기도 했는데요.
[KBS 다큐 '두봉 주교의 어떤 고향'/2011년 12월 25일 : "내 백성, 나에게 맡긴 백성, 내가 담당한 사람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어디 되겠는가. 난 사임 안한다."]
1990년 교구장 은퇴 후엔 의성에서 군위로 넘어가는 접경의 외진 마을을 찾았죠.
농사 짓기를 취미 삼아 주민들과 어울리며 소탈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KBS '라이브 오늘'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은퇴 후 20여 년을 함께한 마을 신자들의 기억 속에 그는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KBS '라이브 오늘'/2020년 1월 22일 : "무엇이든지 기쁘게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고맙게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밝은 눈으로 본다고. 그것이 행복이에요."]
한평생 가난 속에, 사랑만을 차고 넘치게 살다 간 두봉 주교.
늘 낡은 것은 나에게, 새것은 이웃에게 주던 그가 남긴 마지막 인사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였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르네 뒤퐁' 세례명 레나토 신부님입니다.
우리에겐 '두봉 주교'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죠.
70년 넘게 헌신의 삶을 살아온 이분.
뇌경색 수술을 받고 나흘 만인 지난 10일, 향년 96세로 선종해 오늘 안동교구 성직자 묘원에 묻혔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를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기억합니다.
[KBS 다큐 '두봉 주교의 어떤 고향'/2011년 12월 25일 : "누님이십니다. 난 여든셋밖에 안 됐는데 어린애죠 뭐."]
파란 눈의 선한 얼굴, 갑작스런 파안대소는 한번 본 사람도 그 인간미에 녹아들게 만듭니다.
[KBS 다큐 '두봉 주교의 어떤 고향'/2011년 12월 25일 : "우리 동네 아줌마들하고 이렇게."]
1954년 스물다섯 앳된 청년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은 두봉 주교.
전쟁 직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에 온 걸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KBS '라이브 오늘' : "나도 그런 나라로 가서, 힘껏, 힘껏! 마음껏 이렇게 도와줄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서, 그랬어요."]
1969년 안동에서 첫 교구장을 맡은 후, 그가 내건 모토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가톨릭 농민회를 세우고, 한센병 환자를 위한 전문 의원을 만드는 등 묵묵히 고집스레 가장 소외된 이들 편에만 섰습니다.
[KBS '11시에 만납시다' : "좋습니다. 나 스스로가 안동 사람이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순진무구한 얼굴과 미소를 지녔지만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서겠다는 '신념'은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1978년 불량 씨감자 공급에 반발하던 안동교구 신자가 정부에 납치 당하는 이른바 '오원춘 사건' 당시, 이를 직접 항의하다 추방령을 받기도 했는데요.
[KBS 다큐 '두봉 주교의 어떤 고향'/2011년 12월 25일 : "내 백성, 나에게 맡긴 백성, 내가 담당한 사람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어디 되겠는가. 난 사임 안한다."]
1990년 교구장 은퇴 후엔 의성에서 군위로 넘어가는 접경의 외진 마을을 찾았죠.
농사 짓기를 취미 삼아 주민들과 어울리며 소탈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KBS '라이브 오늘'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은퇴 후 20여 년을 함께한 마을 신자들의 기억 속에 그는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KBS '라이브 오늘'/2020년 1월 22일 : "무엇이든지 기쁘게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고맙게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밝은 눈으로 본다고. 그것이 행복이에요."]
한평생 가난 속에, 사랑만을 차고 넘치게 살다 간 두봉 주교.
늘 낡은 것은 나에게, 새것은 이웃에게 주던 그가 남긴 마지막 인사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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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4-14 18:32:09
- 수정2025-04-14 18:36:17

갓을 쓰고 부채를 든 파란 눈의 외국인.
프랑스 출신의 '르네 뒤퐁' 세례명 레나토 신부님입니다.
우리에겐 '두봉 주교'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죠.
70년 넘게 헌신의 삶을 살아온 이분.
뇌경색 수술을 받고 나흘 만인 지난 10일, 향년 96세로 선종해 오늘 안동교구 성직자 묘원에 묻혔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를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기억합니다.
[KBS 다큐 '두봉 주교의 어떤 고향'/2011년 12월 25일 : "누님이십니다. 난 여든셋밖에 안 됐는데 어린애죠 뭐."]
파란 눈의 선한 얼굴, 갑작스런 파안대소는 한번 본 사람도 그 인간미에 녹아들게 만듭니다.
[KBS 다큐 '두봉 주교의 어떤 고향'/2011년 12월 25일 : "우리 동네 아줌마들하고 이렇게."]
1954년 스물다섯 앳된 청년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은 두봉 주교.
전쟁 직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에 온 걸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KBS '라이브 오늘' : "나도 그런 나라로 가서, 힘껏, 힘껏! 마음껏 이렇게 도와줄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서, 그랬어요."]
1969년 안동에서 첫 교구장을 맡은 후, 그가 내건 모토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가톨릭 농민회를 세우고, 한센병 환자를 위한 전문 의원을 만드는 등 묵묵히 고집스레 가장 소외된 이들 편에만 섰습니다.
[KBS '11시에 만납시다' : "좋습니다. 나 스스로가 안동 사람이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순진무구한 얼굴과 미소를 지녔지만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서겠다는 '신념'은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1978년 불량 씨감자 공급에 반발하던 안동교구 신자가 정부에 납치 당하는 이른바 '오원춘 사건' 당시, 이를 직접 항의하다 추방령을 받기도 했는데요.
[KBS 다큐 '두봉 주교의 어떤 고향'/2011년 12월 25일 : "내 백성, 나에게 맡긴 백성, 내가 담당한 사람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어디 되겠는가. 난 사임 안한다."]
1990년 교구장 은퇴 후엔 의성에서 군위로 넘어가는 접경의 외진 마을을 찾았죠.
농사 짓기를 취미 삼아 주민들과 어울리며 소탈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KBS '라이브 오늘'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은퇴 후 20여 년을 함께한 마을 신자들의 기억 속에 그는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KBS '라이브 오늘'/2020년 1월 22일 : "무엇이든지 기쁘게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고맙게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밝은 눈으로 본다고. 그것이 행복이에요."]
한평생 가난 속에, 사랑만을 차고 넘치게 살다 간 두봉 주교.
늘 낡은 것은 나에게, 새것은 이웃에게 주던 그가 남긴 마지막 인사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였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르네 뒤퐁' 세례명 레나토 신부님입니다.
우리에겐 '두봉 주교'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죠.
70년 넘게 헌신의 삶을 살아온 이분.
뇌경색 수술을 받고 나흘 만인 지난 10일, 향년 96세로 선종해 오늘 안동교구 성직자 묘원에 묻혔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를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기억합니다.
[KBS 다큐 '두봉 주교의 어떤 고향'/2011년 12월 25일 : "누님이십니다. 난 여든셋밖에 안 됐는데 어린애죠 뭐."]
파란 눈의 선한 얼굴, 갑작스런 파안대소는 한번 본 사람도 그 인간미에 녹아들게 만듭니다.
[KBS 다큐 '두봉 주교의 어떤 고향'/2011년 12월 25일 : "우리 동네 아줌마들하고 이렇게."]
1954년 스물다섯 앳된 청년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은 두봉 주교.
전쟁 직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에 온 걸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KBS '라이브 오늘' : "나도 그런 나라로 가서, 힘껏, 힘껏! 마음껏 이렇게 도와줄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서, 그랬어요."]
1969년 안동에서 첫 교구장을 맡은 후, 그가 내건 모토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가톨릭 농민회를 세우고, 한센병 환자를 위한 전문 의원을 만드는 등 묵묵히 고집스레 가장 소외된 이들 편에만 섰습니다.
[KBS '11시에 만납시다' : "좋습니다. 나 스스로가 안동 사람이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순진무구한 얼굴과 미소를 지녔지만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서겠다는 '신념'은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1978년 불량 씨감자 공급에 반발하던 안동교구 신자가 정부에 납치 당하는 이른바 '오원춘 사건' 당시, 이를 직접 항의하다 추방령을 받기도 했는데요.
[KBS 다큐 '두봉 주교의 어떤 고향'/2011년 12월 25일 : "내 백성, 나에게 맡긴 백성, 내가 담당한 사람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어디 되겠는가. 난 사임 안한다."]
1990년 교구장 은퇴 후엔 의성에서 군위로 넘어가는 접경의 외진 마을을 찾았죠.
농사 짓기를 취미 삼아 주민들과 어울리며 소탈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KBS '라이브 오늘'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은퇴 후 20여 년을 함께한 마을 신자들의 기억 속에 그는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KBS '라이브 오늘'/2020년 1월 22일 : "무엇이든지 기쁘게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고맙게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밝은 눈으로 본다고. 그것이 행복이에요."]
한평생 가난 속에, 사랑만을 차고 넘치게 살다 간 두봉 주교.
늘 낡은 것은 나에게, 새것은 이웃에게 주던 그가 남긴 마지막 인사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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